저녁이 만든 여유, 삶의 기회로 이어져

  “스트레스 받아” 라는 표현은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쉽게 사용하는 말 중 하나일 것이다. 할 일이 좀 많고, 신경이 거슬리는 일 전반에 사용한다. 하루에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열 번도 넘게 생기고, 그걸 상대해 내는 일상을 산다. 바쁨을 토로하면서도, 은근히 이를 뽐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뽐내는 말이라고 해도 심신이 피폐해지지 않는다는 건 전혀 아니다). 성실하게 커리어를 쌓아가는 젊은 현대인이라면 당연한 삶이다. 나 역시도 그런 의미들로 사용해왔던 것 같다. 

  지금은 스위스에서 4개월 차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곳에서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은 사뭇 다르다. 어떤 문화적, 교육적 배경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꽤나 수치스럽게 여긴다. 공부나 일, 연애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친구를 보면 초반에는 습관적으로 “Don’t get stressed out too much”, 라고 쉽게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전혀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혹은 조금 ‘바쁘지만 할 수 있다. 전혀 스트레스가 아니다’, 라는 식이다. 집으로 일거리를 가져오지 않고,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며, 꾸준히 운동하는 일상을 사는 것이 성공한, 혹은 성공할 사람의 자질로 여겨진다. 스트레스를 받고 이를 못 이겨내는 게 오히려 수치랄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게 하나의 스트레스 같아 보일 정도니까 말이다. 물론 한국이라고 이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간 관찰한 바로는, 여기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이런 삶을 쉽게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학생 때부터 이미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연습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주어진다. 현재 9명의 학부생, 대학원생 친구들과 한 플랫에서 생활을 하는 중이다. 이들의 일상만 관찰해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상당한 채식 위주의 식단과, 넘치는 무료 운동 시설과 프로그램이 있다. 시험기간이 아니고서는 저녁 시간 이후에 일에 골몰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함께 요리하고, 수다를 떨고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소위 저녁이 있는 삶을 산다. 다른 의미로 그들은 치열한 삶을 산다. 직장을 구할 때도, 연애 대상을 찾을 때도 이러한 요소들은 큰 장점이자 긍정적 덕목으로 작용한다. 내가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나름 스위스 최대 도시인 취리히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는 사람들에 한정되어 있어 더 일반화하기 쉬울 수는 있다. 한국에서 무턱대고 바라기에도 분명히 사회 구조적, 경제적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도시인 서울에서 공부하며, 더 치열하게 살았는데, 삶의 질은 더 나쁘다는 걸 생각하면 분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만 더 많은 청년층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챙기는 일에 대해서 더 많이 노출되고, 또 다른 이들이 이를 당연하게 여겼으면 한다.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힘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를 연습할 수 있는 기회 역시 많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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