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EBS 다큐프라임 ‘황혼의 반란’을 봤다. 노인들이 30년 전으로 돌아가 일주일 동안 그때처럼 생활하고, 그 변화를 측정하는 프로그램이었다. 30년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까? 처음 다큐를 봤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자기 자신을 추억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무슨 효과를 창출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영상을 보는 동안 계속 놀라움을 느꼈다. 일주일 동안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 생활하면서 그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게 되었고, 그것은 신체능력과 인지기능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나 역시 노인들의 인지기능이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노인을 도움이 필요한 존재, 기능이 저하된 사람들로 평가하고 있었다. 어린 코끼리를 묶은 상태에서 기르면 그 코끼리는 성장이 끝난 이후에도 밧줄을 끊지 못한다. 즉, 심리적 제한을 당하면 누구나 행동적 제약을 받는다. 그런데 굳이 행동이 조금 서툴러지고 느려졌다는 이유로 노인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할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신체는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사실 그분들과 나는 신체적 연령의 편차가 클 뿐이고 나 또한 언젠가 겪을 일인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청년과 노인은 질적으로 다른 존재이고, 노화는 기피하고 싶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30년 이전으로 돌아가 일주일 간 생활하고 모든 기능이 향상된 그분들을 보면서, ‘노화’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마음가짐과 그에 따른 노력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다. 

  대한민국은 현재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저출생과 더불어 고령사회가 이행될수록 청년을 노동력으로 이용하는 것도 점차 한계에 도달할 것이며, 노인들이 필요한 시대가 올 것이다. 노화를 단순히 ‘신체기능, 인지기능이 저하되고 퇴보하는 것’으로만 정의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편견을 깨부술 필요가 있다. 앞으로는 젊은 성인으로서의 시간보다 노인으로서의 시간이 몇 배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 노인들을 위한 복지 정책은 필요하고, 일자리 정책도 확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우선 그들을 ‘배려해야할 약자’로만 생각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동등한 존재로서의 대우. 그것이 노인들이 외롭지 않도록, 더 사회에 참여할 있도록 이끄는 방법이다. 

  사람은 반드시 늙고, 죽는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노화를 부정적으로 간주하고 외면하기에 인생은 길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노인들의 신체 약화는 치명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기술이 발달한 현재 그것이 그리 문제가 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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