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 건물- 그내력을 아시나요?
이화의 건물- 그내력을 아시나요?
  • 이대학보
  • 승인 1991.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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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105주년 이화의 건물- 그내력을 아시나요? 어느 시대이든지 이화에서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화라는 「어우러짐」속에서 울창한은행나무, 돌계단 50년 이상의 건물등 캠퍼스에 대한 남다른 감회가 개교기념일이 되면 더욱크게 다가온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쉬임없이 새건물이 들어서고 있는 이화캠퍼스를 오랜만에 찾는 졸업생들은 새건물이 들어서고 낯익은 건물이 낯선 이름으로 불리는 등의 환경변화에 한번쯤은 당황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졸업생, 재학생들의 활동 공간인 이화캠퍼스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변모해 왔을까? 1935년 정동에서 「독자적인 아늑함」과 「양지바른 기슭」이라는 신촌동 땅으로 이전한 뒤 최초로 세워진 건물은 개성에서 나온 화강암을 쌓아 고딕건물 형태로 만들어진 본관, 체육관, 음악관이다.

그리고 1938년 기숙사, 보육관( 현 사무처관)이 완공되어 학교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화캠퍼스의 얼굴격인 본관은 6.25이전까지는 이화의 전교생이 거의 수업을 받던 곳이다.

이화의 얼굴 「본관」 신앙심이 깊고 총망받던 김애다라는 학생이 졸업반때 병으로 세상을 더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김애다 기도실을 비롯, 총장실, 학무처장등 이 본관 건물내에 위치해 있다.

본관과 함께 낙성된 음악관은 피아노와 노래연습을 위한 장소 이외에 신촌교사로 이사온 당시 선교사 사택이 마련되지 못하자 선교사의 기거처로 음악관 옥상이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60년대 이전의 졸업생들에게는 아직도 기숙사라 불리는 진·선·미관이 학생수의 증가로 많은 술흘 수용할 수 없자 1959년 부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기숙사가 완공되기에 이르렀다.

이강시 공동생활에 대한 선망이 높아 지방학생들 중 입주기회를 놓칠 것을 우려해 졸업생이 딸을 데리고 와서 교수들에게 정하는 정경이 빚어지기도 했다.

1958년 「철도위를 지나는 구름다리」즉, 이화교건립은 위험한 철도길을 몰래 건너다니며 등·하교하였던 이화인에게 큰 불편을 없애주는 역할 을 했음엔 틀림없다.

그리고 이화교를 건너서 광장 왼쪽의 마흔 다섯 돌계단을 오른 곳에 우뚝 서있는 대강당. 대상당은 개교 70주년 행사를 거행키 위해 1954년에 착공되어 만 2년 1개월만에 낙성, 준공 되었을때 국내 최대, 동양최대의 강당으로 화제를 모았다.

「돌의자·팔각대」 시설이 빨리 완비되다보니 냉방장치와 화장실설비가 미처 이루어 지지 못하다가 1965~66년에 와서 대강당으로 오르는 45계단이 화강암 돌계단으로 단장되고 미비했던 설비가 끝나면서 낙성 10년만에 대강당은 완공된 셈이되었다.

이밖에도 1936년에 완공되어 우리나라 사범교육의 요람이 된 곳, 이화교를 건너면 맨먼저 마주보이는 아름다운 2층 석조 건물인 사무처관이 처음에 주로 실습 유치원, 예전의 이화유치원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건물 이외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으로 동상과 석상이 있다.

이화인들이 봄이되면 사진찍기에 적합한 장소로 많이 찾는 본관과 아펜셀러관 사이에 김활란 박사 동상 뒤쪽에 위치한 돌의자와 돌대(팔각대) 역시 그냥 스쳐지나기 쉬운 대상이지만 눈여겨볼 장소이다.

돌의자의 경우 신촌교를 짓는데 필요했던 일부의 땅을 희사했던 그레이 여사를 기념하는 내용이 뒷편에 새겨져 있고 화강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팔각대도 신촌으로 이전할 당시 총장이었떤 아펜셀러를 기리면서 대 위에 해시계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일제말에 증발되어 대만 남아 있는 상태다.

우리에게 낯익은 길, 잔디의 이음은 언제부터 불려진 것일까? 1962년 3월 이대학보사에서는 어느 동창이 기고한 내용을 받아들여 캠퍼스 이름짓기 운동을 벌여 나갔다.

큰 호응속에서 운동을 벌였으나 적절한 이름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8개월이 지나서 야 17곳의 으름이 정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대학보사 1962년 11월 5일자를 보면 「이화인의 아침은 이길로부터 시작된다(중략).산촌행 만삭버스에서 한바탕 체력다툼을 한뒤 겨우 운동장이 보이는 이길까지 오면 저절로 휴-한숨을 몰아쉬게 된다….퇴교시엔 「오늘 하루범사에 감사합니다」뜻의 휴우 연발, 이래저래 이길은 휴웃길인 모양이다 」이처럼 「휴웃길」은 이러한 특성으로 이름 붙여졌다.

이밖에도 「소요길」「성문길」등이 이 당시에 이름 붙여진 길들이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이캠퍼스는 건물, 길, 석상 하나에도 깊은 내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이화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캠퍼스에 대한 애정이 더 깊은지 모른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면 「이화하면 떠오르는 상징물」이 부재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화의 상징물은? 고대의 「호상」, 「석탑」, 연세대「독수리상」, 건대「황소상」, 작년 3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서강대의 「알바스트로」등은 각 학교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이해, 계승발전시킨 하나의 모범으로 떠올려지는 것들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화캠퍼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구받게 된다.

현재 이화내에서 신추그 증축공사가 한창 진행중에 있다.

1990년들어 박물관 신축을 선두로, 현재 진행중인 건물은 체육관 증축과 인문과학대학 교수 연구관(가칭)공사이다.

이와같은 건물의 건축설계는, 이화내에 남아도는(?)땅에 우후죽순식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화캠퍼스의 전체적 조망-이화의 경우, 부채꼴 모양으로 신축-하에 세워진다고 한다.

공간협소 문제 신축·증축은 학생, 교수의 공간확보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로 계획되고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학교 생활을 돌아보면 이에대한 요구는 더 절실해 진다.

수백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대형강의, 대학원뿐만 아니라 학부생에게도 절실한 세미나실의 부족, 90년 가정대의 「과방확보투쟁」, 시간을 정해서 가지 못하면 점심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식당의 협소함. 이러한 것들이 우리 공간부족의 한 단편의 반영이 아닐까 싶다.

저녁 늦게 도서관을 나설때, 아스라히 비치던 교정의 수은등 빛깔, 수업시간에 늦을세라 매일 달리던 이데오르기 계단. 이름 붙여진 대로 오르 내리면서 숨한번 쉬게 된다는 「휴웃길」. 이러한 것이 졸업생, 재학생에게 이후에도 아련히 느껴지게 하는 대상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 이화 캠퍼스에서 생활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하나」를 느끼게 하는 상징물을 통해 재학생, 졸업생간의 유대의 끈이 더 튼튼히 남아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