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80년대를 마감하고 90년대를 첫 출발하는 올해, 급변하는 정책과 복잡한 상황 속에서 학생운동은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가. 본사에서는 「학생의 날」을 맞이하여 「89년 학생운동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기획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괌심을 바란다.

<편집자> 「90년은 준비하고 91년에 투쟁하여 92·93년에 승리하자」는 전체 민족민주운동의 슬로건 아래 「준비」의 시기였던 90년에 이루어진 올해의 학생운동이 일단락되어가고 있다.

백만학도의 구심체인 「전대협」을 중심으로 「운동의 대중화와 통일단결」을 구현하고 학생운동을 한단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들은 그에 상응한 성과물과 함께 적지 않은 한계와 오류를 노정하기도 하였다.

한해의 대중사업이 일정부분 마무리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그간 진행된 대중사업을 살펴보고 각각의 성과와 함께 한계를 철저히 진단하여 혁신하여야 할 과제를 보다 분명히 하는 것은 향후 투쟁의 근거와 토대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견지에서 청년학생들의 대표조직인 「전대협」을 중심으로 90년 각 시기별 정세와 그 속에서 나타났던 투쟁사업들을 살펴보면서 학운을 평가, 정리하고 새롭게 제기되는 과제와 역할을 전망해 보기로 한다.

90년대를 시작하는 벽두부터 1월 22일, 「민자당」의 창당과 「전대협」의 건설은 남한사회에 있어 전면적인 충돌의 일대 격전을 예고하였고, 정세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87년 이후 급성장한 민족민주운동의 역량에 정치적·경제적 위기의식을 느낀 노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체제 유지를 위해 3당 합당이라는 「정계개편」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2 이후 민자당을 매개로 전선의 재건이 시급하게 요청되는 시점에서 명동성당에서 개최되었던 「2.24 국민대회」는 반민자당투쟁을 선도적으로 수행한 학생운동의 첫 출발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합당 이후 정권은 또한 금융실명제, 토지공개념 등 개혁입법안을 후퇴시키고 성장 위주의 정책을 표방하면서 단병호 전노협의장 구속 등 민중운동탄압을 강화해 나가며 이에 대한 불만을 「북방정책」이라는 무기로 무마시켜 나간다.

그러나 물가폭등, 집값 상승 등에 대한 민중의 생존권적 불만과 합당에 따른 정치적 분노는 광범위하게 확산, 자생적 투쟁을 폭발케 한다.

4.4 보궐선거를 기점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한 반민자당 투쟁은 4월 정국을 급격하게 고양시킨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방송민주화 쟁취를 요구하며 전개된 KBS 파업투쟁, 82m 골리앗투쟁을 전개한 현대중공업 투쟁은 3당 합당에 대한 국민의 반대의지를 각기 영역에서 실천적으로 나타내며, 이후 전체운동의 활로를 개척한 5.9투쟁의 결정적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90년 상반기에 가장 두드러졌던 성과로는 지난해 공안정국 한파로 인한 학생들의 무기력증을 일시에 무너뜨린 「5.9 반민자당 시위」를 들 수 있겠다.

서울 4만, 전국 8만이라는 거대한 시위 인파를 이끌어냈던 5.9투쟁은, 이 전날인 5월 8일 전대협의 「민자당 중앙당사 점거투쟁」과 각 학교단위의 철야농성, 과토론회, 분임토의를 거쳐 진행되면서 청년학생의 투쟁의 위력을 과시하였다는 데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5.9투쟁은 이후에 있어 국민들의 자생적 분출을 강력한 투쟁으로 전화시키지 못하면서 명확한 한계점을 노출하였다.

이는 첫째, 현정권의 지배전술이 갈수록 고도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노정권은 한·소회담, 남북자유왕래선언 등 「북방정책」의 공세를 통해 안정적인 사회적·심리적 조건을 창출함과 동시에 민중운동을 무마시켜 나간다.

또한 군조직법·방송관계법 등 26개 악법을 30초만에 날치기 통과시키는 등 법적·제도적 장치를 자신의 지배구도에 할용해 나간다.

여기에 국연, 전노협 간부 등 대중지도부 구속과 이데올로기 공세의 치밀한 침탈은 노·학 운동의 상층부를 파괴하고 조직력을 와해시키는 현상을 낳았다.

둘째, 국연이나 전대협의 지도방침의 미비와 각 노선의 혼란으로 향후 지속적인 전망과 과제를 내오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87년 이후의 최대 규모의 시위」라는 언론의 대서특필에 무색하게도 급격한 투쟁의 하강을 가져온다.

이 가운데 5월 19일, 전남대에서 「제4기 전대협」이 발족한다.

전대협 발족식은 당국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4만여명의 전국 대학생들이 모여들어 전대협을 투쟁 속에서 건설해 내고자 하는 의지를 명백히 보여주었고, 전대협이 명실공히 학생운동의 구심체임을 입증시켜 주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광주집결이냐, 아니냐의 왜곡된 논쟁과 광주에 집결했던 10만의 투쟁성을 받아 이을 이후 투쟁계획의 부재는 투쟁의 동력을 재충전하지 못한 채 끝나 버리고 말았다.

또한 광주투쟁이 당면한 반민자당 정치전선과의 긴밀한 연관속에서 배치되지 못하고 「광주문제 청산의 부당성」만으로 매몰된 감이 없지 않았다.

물론 이 시기가 90년 정세에서 가장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90년초까지 탄압공세에 눌리어 있던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진출한 시기에 지속적인 정세의 고양을 담보할 매개고리를 잡지 못하고 정치적 지도가 부재하여 5월투쟁이 올바르게 계승되지 못한 채 침체 일로를 걷다가 6.10집회 역시 대규모 대중운동이 되지 못하고 성균관대 집결투쟁이 추모제 형태로 머무르고 말았다.

이러한 상반기 투쟁의 대응 미비 속에 하반기 들어 더욱 안착화된 정권의 탄압은 민중들의 관심을 북방정책으로 돌리면서, 정치적으로는 보안사 민간사찰, 전쟁선포와 경제적으로는 다양한 증시부양책이나 대기업위주의 정부금융혜택을 통 독점재벌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타격을 만회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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