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31년이 지난 지금에도 4.19는 이 땅의 민주를 염원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미완의 혁명」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미완의 혁명」의 결실을 보고자 이화인들은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이에 본사에서는 60년대 당시 이화 이화인들의 행적을 살펴보고, 현재 이화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자 이 난을 마련한다.

<편집자> ● 2월 28일… 대구 민주당 선거유세. 일요일임에도 학생 등교 강요. 대구시내 고교생들「학원자유」, 「학생인권옹호」를 부르짖고 거리로 뛰쳐나옴. ●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일. 마산에서 선거부정 선포. 학생, 시민, 투표참관인이 합세하여 재선거 요구. 경찰과의 충돌끝에 경찰의 무차별발사. 많은 사상자생김. ● 4월 12일… 마산 시위에서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군 처참한 시체발견. 온시민이 궐기하여 시가를 뒤덮음. ● 4월 18일… 마산 유혈사건에 분노한 각대학 학생들이 궐기를 준비. 이날 선두로 고대생 3천여명이「민주역적 물러가라」는 구호 외치며 국회앞에서 농성. 깡패들의 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냄. ● 4월 19일… 이에 분노한 서울시재 둥·고·대학생과 시민들이「깡패들 배후조종자 규명하라」,「자유당정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내를 휩쓸었다.

또다시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상자 생김. 이렇듯 4·19는 그동안 미국에 의한 차관원조의 기형적 분배로 인해 누적되었던 민생파탄에 대한 민중들의 불말과 미국에 예속된 독정권 타도의 의지가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폭발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당시에도 역시「선봉」에 선 사람은 불의와 부정을 참지 못하는 열혈 청년학도들 이었다.

그러면 그당시 이화는 4·19를 어떻게 맞이하였는지 살펴보자. 4월19~29일까지 이화는 임시휴교상태였다.

4·19학생시위와 25일에 있었던 교수단시위에 거교적으로 참가하지 않아 시중에는「이대생과는 연애도 하지않고 결혼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이화인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비록 개인적으로 3백여명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하지만) 29일 닫혔던 문을 활짝 열고 전교생은 한자리에 모여 채플시간에 김옥길 총장의 특별훈화 - 「우리의 갈 길을 가르쳐 준 많은 학도들의 뒤를 따라 앞으로 십년, 오십년이 될지라도 피를 흘려 가면서라도 그들이 닦아놓은 민주제단을 수호해 나가야 할 것」- 를 들었다.

4·19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여러가지 변명 - 휴교상태여서 이화 학생대표나 교수단에게 연락이 불가능했다든지 - 을 뒤로 하고 어쨌든 이화는 4·19 뒷수습에 온 힘을 기울인 듯하다.

엄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헌신적인 의료봉사활동, 본교 동대문 부속병원에서 19일 당일부터 부상당한 환자를 보살피고자 간호학과 학생전원과 직원이 매일 철야근무를 하면서 주위의 칭찬을 샀다.

또한 이화인들은 4·19 부상자와 유가족을 위한 모금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그당시 이백만원에 달하는 돈을 거두어 관계당국과 치안확보에 협력중인 각 대학에 기탁하고 지지방문에 나섰다.

5월 19일 각학교 4·19대책위원회주최로 열린「순국학도들을 위한 합동위령제」에 약 8백여명이 참가하고 이후에 본교에서 유가족을 위한「위안회」를 가졌다.

이번에는 당시 이화의 교수들은 어떻게 4·19를 맞이하였는지 그당시 학보를 찾아보면 △ 4·19를 어떻게 맞이하셨습니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시위에 참석못한 방관자 였습니다.

(국문과 김모 교수) △ 4·19로 가장 감명, 충격 받으신 것은? ▲ 교육의 힘은 누룩과 같아서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사이에 무서운 변화를 일으키지만 그 변화의 원동력이 학생들에게 있었을 줄이야(심리학과 김모 교수) 이렇게 이화는 60년 4월을 맞이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기록에서 이화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화가 4·19의 선봉에 서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딛고 일어서야 할 과제이다.

지금 4·19 31주년을 맞아 이화인들은 이러한 과제를 앞에 두고 과거의 역사를 곱씹어보며 현재의 모습을 올곧게 세워나가야 할 시기이다.

(1960년대 이대학보 참조) 황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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