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금만 느긋하게 가봅시다

  제 대학시절의 단짝은 불안감이었습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지금 빨리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사회적 압박감이었습니다. 25년간 그 누구도 저에게 “천천히 해”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해야만 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고, 취업이 아니면 대학원, 고시 준비 등 얼른 빨리 자신의 길을 선택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았습니다.

  대학생이 된 자유를 채 누리기도 전에, 어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라는 무언가의 종용 속에서 항상 불안했습니다. 여러 전공도 들어보고, 마음이 맞는 동아리도 해보고, 계절교환도 다녀오고, 봉사활동도 꾸준히 했지만, 이따금 “이제는 취업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할 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점 ‘효율적인 행위’에 대한 압박감은 심해졌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피로를 느꼈습니다. 운동이나 제2외국어를 배워보기도 하고, 12kg 배낭을 메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기도 했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를 찾는 이 ‘불안함이라는 단짝’과 멀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잇. 내 단짝이 싫어할 짓을 해서 저 친구와 멀어지자! 천천히 살아보자” 맨날 후배들에게만 해주던 조언을 스스로 실천해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어쩌면 너무 경험이 없는 자의 ‘순진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이화 밖에서는 시베리아 벌판보다 냉랭하게 얼어붙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기에, 이런 감성적인 말은 ‘꼰대’같은 말로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4년간 이화를 경험했기에 오히려 이화에는 이런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집합인 이곳 이화에서는 나만 뒤로 밀리고 있는 느낌을 받기 쉽습니다.

  가정의 달 5월엔 가족들을 더 많이 만나고 그분들은 여러분들에게 더 빨리 달리라는 채찍을 휘두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저라도 그 채찍으로 얻어맞은 자리에 조금이나마 따스한 온기가 될 수 있도록 말하겠습니다.

  천천히 가세요. 우리는 100m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맞이할 시대는 그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무차별적인 세계화는 우리를 무한경쟁 속에 내몰고, 가족 간의 관계는 약화되지만 부양할 사람을 늘어난 세대입니다. 이 시기를 함께 겪고 있는 벗들에게 꼭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천천히 해도 돼요. 천천히 그리고 충분히 가고 싶은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봅시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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