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사랑 정의하는 것, 물의 형태를 논하는 것과 같아

  어느 부족이 신으로 받들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종과 인간과 사랑을 다룬 영화 <The Shape of Water>(2018)을 보고 신의 얼굴과 사랑의 모양을 생각했다. 감독이 만들고자 노력했다던 'Lovable한 괴물' 앞에 감히 타인의 사랑에 값을 매기던 모든 목소리가 무색하다.

  남자끼리 만난다고? 여자끼리 사귄다고? 걔네 둘이 인종이 다르다고? 그의 애인에게 장애가 있다고? 대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물에서 발견됐다는 말 못 하는 여자와 물에서 숨을 쉬는 인어의 사랑을 그리는 세상에서.

  사랑은 문제(로 보였던 것)들을 눈멀게 한다. 이미 멀어버린 두 눈이 묻는다. 그게 정말 ‘문제’라고 불릴 만한 일이었나? 무엇이 그것을 문제로 만들었는가.

  그를 살려야만 한다며 흐느끼는 주인공의 얼굴에서 사랑을 읽는다. 인어에 대한 감정을 알기 전에도 그가 다른 종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어의 눈에서 그녀 자신을 볼 뿐이다.

  모든 것의 틈을 메운 채 차오르는 물처럼, 사랑은 인종, 성별과 장애를 포함한 모든 벽에 스민다. 물은 흐르고, 멈출 듯 흔들리고, 왈칵 솟구치며 가라앉은 것을 감싼다. 사랑도 물도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알 수 없지만, 동시에 내 시선이 닿은 그곳에 존재한다.

  흘러가는 말로는 물을 붙잡아둘 수 없다. 그저 모든 것을 쉼 없이 매만지고 어우러지며 덮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물도, 사랑도, 신도 우리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정의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미뤄둔 채 신에 관한 것을 넘보는 것 자체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영화는 60년대, 냉전 시대의 한복판인 미국에서 전개된다. 늙은 무직의 게이와 흑인 여자와 장애를 가진 청소노동자가 스스로를 신의 얼굴에 가깝다고 굳게 믿는 이를 제치고 인어를 구한다. 신이 원하는 ‘옳은’ 것을 넘겨짚던 범인(凡人)들은 청소 노동자들의 무능력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이들을 스쳐 지날 뿐이다.

  때때로 신은 각자가 도저히 믿지 못할 모습으로 예기치 않게 나타난다고 누군가 말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다가가는 순간, ‘당신은 신이었구나’ 알아채게끔 하는 것이 신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느낀 것이 당신에게도 닿길 바라며 영화 속 시를 인용한다.

  ‘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 I find you all around me. 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your love, It humbles my heart, For you are everywhere. (그대의 모양 알 수 없네. 내 곁엔 온통 그대뿐. 그대의 존재가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고 내 마음 겸허하게 하네. 그대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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