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 가르침이 자만을 극복케 했다

  “사람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왜 검은 부분으로 세상을 보는 것일까?”

  “그것은 세상을 어두운 면에서 보는 편이 좋기 때문입니다. 밝은 면에서 보면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서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기 때문에 그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대담으로 이뤄진 「탈무드」의 한 구절이다.

  인간의 몸은 하나의 우주와 같다고 한다. 세상의 이치가 온몸 구석구석에 담긴 셈이다. 눈도 그중 하나다. 위의 대답은 세상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오히려 비판적인 시각으로 나 자신을 직면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모든 것에 회의적인 낮은 자존감도 경계해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자만심이다. 넘치는 자신감은 독이 된다.

  이화는 내게 뚜렷한 흑안(黑眼)을 선물했다. 학창시절의 나는 글 쓰는 것에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교내, 교외 가릴 것 없이 열리는 모든 글쓰기 대회에 참가했고 수상은 자연히 따라왔다. 또래에 비해 독서량이 많다 자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화여대에 입학하고서 나의 자부심, 아니 자만심은 와장창 깨졌다. 처음 들었던 미디어 글쓰기 수업, 나의 첫 기사는 빨간 줄투성이였다. 비문도 많았고, 현학적 수사의 나열들로 논지가 파묻혀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모든 학기에 작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수업을 꼭 넣었다. 나의 자만에 대한 반성의 실천이었다.

  교수님뿐만 아니라 학우들도 나에게 객관화의 시각을 던져줬다. 복수전공을 하고 있는 국문과의 비평 수업, 작품에 관해. 조를 지어 학우들과 얼굴을 맞대고 비평을 나눴다. 글로 쓴 적 없음에도 유창하게 자신의 생각을 언어에 온전히 담아내는 학우들을 보며 그렇지 못한 나의 부족함을 절감했다. 

  이화는 내게 지성인으로서 반성하고 자정하는 태도를 가르쳐줬다. 여성학적 관점에서 교수님들도 자신을 객관화하고 성찰함에 주저함이 없었다. 이처럼 이화는 배움을 업(業)삼는 지성인이라면 응당 자신을 성찰하고 언제든 고쳐나가야 함을 직접 보고 체화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진정한 배움의 장이었다.

  이화에서 배운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나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했다. 나의 부족함을 알아차리고, 그 빈틈을 메워 더욱 견고한 나로 성장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내가 생각하지 못한 시각을 인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노자(老子)는 검정을 가지고 현묘함을 말했다. 경지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미묘하단 뜻이다. 이 세상의 온갖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나온다. 역설적이게도 검은색은 이 세상에서 가장 다채로운 색인 것이다. 검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단지 세상을 어둡게 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어두움이 결국 모든 색을 담고 있음을, 나 스스로를 객관화시킴으로써 결국 세상의 온갖 시각을 품은 사람이 되라 말하는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나는 오늘도, 검은 눈을 빛내며 세상을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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