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내가 친척들에게 들었던 말이다. 이모부께서 “지금이 여성상위시대”라고 말씀하셔서 내가 발끈했고, 다른 어른들까지 가세해 여성인권에 대해 논쟁하던 중이었다. 꽤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격렬했던 토론과 내 소신이 담긴 문장들은 저 한마디로 인해 모두 종결됐고, 난 아직 경험이 없고 뭘 모르는 어린 아이가 됐다. 부모님을 포함해 모든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찔끔 났다. 내가 하는 말이 어른들에게,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가 되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나이가 많았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글쎄, 내가 설령 그들과 동년배였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는 나이가 아닐 뿐이었겠지.

  어른들은 삶의 지혜는 나이와 비례한다고 말한다. 아마 일정 부분 사실일 것이다. 삶의 경험이 많다면 그만큼 깨닫는 바와 요령이 늘어날 테니까. 하지만 여성인권을 논할 때 나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이는 경험의 정도를 나타낼 수 있지만,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절대적인 척도가 아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경험한다고 해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오히려 경험을 과신해서 놓치는 부분이 많을 수 있다. 상대방이 정말 나이가 어려서 모르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것을 상대방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나이뿐만 아니라, 국적, 성별, 인종, 장애 등이 타인을 배척하고 외면하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중국인들은 무례하고, 여자는 감정적이며, 흑인들은 거칠다.’ 이러한 프레임은 타인을 정의하고 배제하기 위해 사용된다. 사람들이 차별과 소외에 갖다 붙이는 이유들은 진정한 배척의 이유가 아니다. 남성, 연장자, 백인들과 같은 권력자들이 기득권을 위해 억압의 명분을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내가 여성인권에 대해 발언한 것이 그들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졌기에, 나를 ‘아직 어린 학생’이라는 프레임에 가둔 것이다. 자신들의 의견을 나이와 경험의 차이로 정당화하는 것은 상대방 입장에서 참 맥 빠지는 일이다.

  한 가지 요소가 누군가를 결정하거나 정의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 세계에서 한국인으로, 여성으로, 아직 어린 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에 의해 제한된다는 의미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여자니까, 아직 어리니까 묵살된다. 한 사람의 의견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내 세대에서 완성되길 바란다면, 그것은 너무 큰 꿈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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