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하는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제도가 필요

  혼인 상태가 아닌 것이 흠인 시절이 있었다. 아직도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인식이 점차 변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결혼을 못 했다’는 뜻의 미혼에서 ‘결혼을 안 한다’는 의미의 ‘비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방송에서도 비혼을 소재로 하는 콘텐츠들이 하나둘 생기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비혼주의였다. 기억하기로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주변에 ‘독신’을 선언하고 다녔다. 반응은 전형적이었다. 부모님은 초등학생이 하는 말을 진지하지 않게 받아들이셨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말 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결혼한다는 둥 이야기를 했다.

  요즘에도 부모님께 비혼주의임을 말씀드리면, ‘비혼은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답변을 받는다. 결국에는 결혼을 하라는 의중일 텐데 결혼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개인의 능력을 운운하는 것은 핑계일 뿐, ‘비혼’을 흰 눈으로 보는 사회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에 불과하다.

  비혼주의를 택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사회와 분리된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일 수도, 여성에게 과중하게 지워지는 결혼의 무게 때문일 수도, 혹은 결혼이라는 제도의 전제인 '사랑'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이유가 있고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든 외부적 압박의 결과든 비혼 자체로 다른 사람에게 가치를 재단당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퍼포먼스로서 ‘비혼식’이 등장했다. 비혼식은 혼자 살아가는 삶을 기념하기 위한 예식이다. 비혼식 자체가 사회 전반에 보편적으로 확대되진 않았지만, 싱글 웨딩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TV에서는 실제 비혼식 현장을 담은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비혼식의 표면적 의미는 비혼 선언, 주변인들의 응원과 지지, 축의금 환수 등이 있다. 일각에서는 축의금을 돌려받으려는 계산적인 의도가 현대사회의 삭막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하지만, 결혼식에서도 축의금 문제로 관계가 어긋나는 등을 보면 결혼식과 비혼식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비혼식은 단순한 예식을 넘어, 비혼을 삶의 한 형태로서 인정받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여남 간의 혼인 관계가 아니면 법적인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는 자연스레 경계선 밖에 있는 사람들을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제도적 혜택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변화하는 사람들의 의식과 현 제도가 충돌할 때는 제도의 전제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혼자 사는 사람, 동성끼리 사는 사람, 친구로서 함께하는 사람 등 수많은 삶의 형태는 실재하고, 지금의 제도는 이들을 모두 소외시킨다. 본교 법학전문대학원 소속 모임 ‘풀하우스’는 ‘파트너등록법’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친밀함을 바탕으로 가족으로 생활할 의사를 가진다면 누구나 ‘파트너’로 등록할 수 있게 하는 법”이다. 제도적인 뒷받침을 바탕으로 비혼이 치기 어린 일탈이 아닌, 진지한 지향점으로 여겨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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