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어렸을 때부터 접할 기회 만들어야
성평등, 어렸을 때부터 접할 기회 만들어야
  • 권소정 사회부 부장
  • 승인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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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어린이 베스트셀러 도서, 페미니즘 관련 책 많아

  8월 말 여름방학, 처음으로 미국 뉴욕(New York)에 가봤다.

  출발 전부터 들뜬 기분은 비행기를 타서도 가라앉지 않았다. 한 숨도 못 자고 도착한 뉴욕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영화 같았다. 네모반듯한 도로, 도심 곳곳에 있는 정원, 높게 늘어서있는 오래된 빌딩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모두 한국에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만 보던 모습이었다.

  ‘여기도 본적 있어’라고 생각하며 뉴욕을 돌아다닌 지 며칠, 풍경이 익숙해지니 점점 색다른 광경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 중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에 긴 바지를 사러 들어간 의류매장에서 본 모습은 아직도 뚜렷하게 생각난다.

  당시를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매장이 커 긴 바지가 어디 있는지 한 번에 찾지 못하고 두리번거리자 남성 판매원이 다가와 어떤 옷이 필요한지 물었다. 왠지 모를 어색함 때문에 주춤주춤 긴 바지를 찾고 있다고 말하니 그는 아래층에 내려가라고 안내해줬다.

  지하로 이어진 에스컬레이터에서 아래층을 담당하는 여성 경비원이 쇼핑 중인 사람들을 주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라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자 경비원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옷을 고르며 곁눈질로 본 매장 한 구석에는 여성 직원이 옷이 가득 든 커다란 박스를 들어 창고로 옮기는 중이었다. 바지를 골라 남성 점원이 있는 계산대에서 계산한 후 매장을 나왔다.

  이 매장은 한국에서 가본 의류매장과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모습이었다. 단편적인 경험을 했지만 상대적으로 미국이 한국보다 성(性) 역할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들린 한 책방에서 미국의 성역할 경계가 희미해 보인 이유를 조금 엿볼 수 있었다. 그곳은 뉴욕 중심에 있는 커다란 책방이었는데,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책으로 빽빽했다. 전체적으로 둘러보다 2층 어린이 책을 전시한 곳에 발길이 멈췄다. 페미니즘 책이 보였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어린이 책을 놓아둔 판매대에는 ‘반역자 소녀들을 위한 잘 때 읽는 이야기’(Good night stories for rebel girls), ‘페미니스트 아기’(Feminist baby) 등의 제목을 단 책들이 진열돼 있었다. 새로 발간된 어린이 책이 있는 판매대도 비슷했다. ‘여성 과학자들’(Women science), ‘뛰어난 여성들’(Tuff Ladies) 등의 책이 구매자들의 눈에 잘 보이게 놓여 있었다.

  그 중 ‘페미니스트 아기’는 한 페이지마다 각 알파벳에 상응하는 단어들이 하나씩 적힌 언어 공부용 책이다. 알파벳을 공부하는 책이지만 ‘F’로 시작하는 단어에는 페미니즘(Feminism)이, ‘G’로 시작하는 단어로는 글로벌(Global)이 예시로 제시돼 있다.

  서점에서 본 어린이 베스트셀러 책 중 상당수가 페미니즘과 관련돼 있었다. 어린이 책 구매자는 보통 부모다. 즉, 부모가 자녀교육에 페미니즘을 필수 요소로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어린이용 페미니즘 책이 많이 팔렸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성평등을 접할 가능성이 높을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어린이 도서는 한자 만화책, 과학 서적이다.

  어릴 때부터 성평등을 접할 기회가 많은 미국도 아직 성평등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릴 때 성평등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는 한국의 성평등은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