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100주년기념박물관 청자전

이화100주년기념박물관 ‘청자 전(展)’ 12월30일까지 선보여

다리부터 매병까지 본교 소장 청자 약 200점 공개 중

1958년 입수된 전라북도 부안군 유천리 가마터청자 파편도 포함돼

 

▲ 1전시실의 다기 모음 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10세기 이래로 청자를 만들기 시작한 고려인들은 식생활, 주거 등 일상문화부터 각종의례, 분묘 부장까지 삶과 죽음의 순간을 모두 청자와 함께했다. 하지만 동시에 청자를 아름답게 제작함으로써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예술을 향유하기도 했다.

  고려의 삶을 그대로 담은 청자전(展)이 이화100주년기념박물관(박물관) 2층에서 12월30일(토)까지 열린다. 전시에는 본교 소장 청자 약 200점과 더불어 1958년 박물관에 입수된 전라북도 부안군 유천리 가마터(현 유천리 12·13호) 수습 청자파편자료가 포함돼있다. 그동안 소장해온 청자를 한꺼번에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찻잔으로 사용된 '해무리굽 청자 완' (11세기) 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차(茶)에서 피어난 고려의 청자 문화

  1전시실 가장 앞부분에 위치한 비취색 민무늬 찻잔이 청자전의 시작을 알린다. 입구가 넓고 받침이 좁은 사발 형태를 띠는 이 청자는 당대 찻잔으로 사용됐던 ‘해무리굽 청자 완’(11세기)이다. 전시의 서막을 연 ‘해무리굽 청자 완’은 초기 청자의 표식으로 여겨진다.

  11세기 고려에서는 누구든 참선(參禪)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 불교의 열풍 속 다선(茶禪)이 함께 부상했다. 차를 마셔 정신을 맑게 하면 참선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차 문화의 발달은 자연스레 다기(茶器)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특히 당대 귀족 및 승려계층이 청자를 찻잔의 재료로 선택해 청자 제작을 촉발하게 했다.

  ‘청자 완’을 시작으로 1전시실을 둘러보면 음료를 담는 용도로 사용된 청자들이 공간을 메우고 있다. 특히 오늘날 주전자와 유사한 형태인 ‘주자’들이 줄지어 있는 전시 벽면이 눈에 띈다. 그 중 ‘청자상감 국화모란문 과형 주자’(13세기)는 오이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뤄져있다. 이와 같은 주자들은 술을 따르는 주기로 사용되다 차 문화의 유행에 따라 다기로 쓰이기 시작했다. 국화, 모란 등의 꽃이 섬세하게 그려진 표면이 인상적이다.

 

▲ 주기와 다기로 사용된 '주자' 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청자, 예술과 삶의 공존

  1전시실에서 2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기면 차 문화에서 시작된 청자가 점차 일상생활로 스며드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다. 다기가 대부분이었던 1전시실과 달리 2전시실에서는 보다 다양한 용도의 청자가 등장한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청자상감 화접운학문 베개’(13세기)다. 영롱한 비취색 하늘에서 조화롭게 노니는 학과 나비가 상감기법으로 세밀히 새겨져있다. 그 주변을 감싸는 국화와 연꽃무늬는 신비로움을 한층 더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베개 양 측면에 구멍이 있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이는 11세기 말 송에서 고려로 유입된 『침중기』 고사의 유행에 따라 ‘꿈을 꾸기 위해 들어가는 통로’로 해석되기도 한다.

  고려 청자는 생활 용품으로 소비됐지만 예술로서 지녀야 하는 미를 결코 잃는 법이 없었다. 이러한 특징은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12세기)에서도 그대로 구현된다. 보통 대중에게 알려진 운학문 청자는 학이 빼곡하게 새겨진 형태지만,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은 학이 4마리밖에 그려져 있지 않다. 고려시대 문인들은 이 청자를 감상하며 푸른 하늘을 여유롭게 날아다니는 학을 떠올렸다고 한다. 즉, 운학문 매병은 술, 기름 등을 담는 실용적 기능도 했지만 예술 작품으로서 감상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 원나라 도기의 영향을 받은 '청자상감 용문 매병' 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역사적 산물로서의 청자

  청자에는 고려의 역사가 담겨있기도 하다. 앞서 ‘청자 완’을 포함한 각종 청자 다기에는 고려 초기를 휩쓸었던 선종 불교의 영향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나머지 시기에 제작된 청자 역시 고려의 역사적 흐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려의 청자는 13세기부터 점점 문양은 화려해지지만 질은 하락하는 현상을 겪게 된다. 이의 배경에는 금나라의 침입부터 무신 정변까지 대내외적으로 혼란을 겪었던 고려의 역사가 존재한다. 각종 사회 혼란을 겪으며 청자 수급 및 제작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박물관 황이숙 연구원은 “12세기까지 청자의 질 자체에 좀 더 관심을 가졌던 시기라면 13세기부터는 문양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청자의 비색이 많이 사라지게 되는 시기였다”고 언급한다. 이를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청자상감 포류수금문 기사명 발’(14세기)이다. 화려하고 세밀한 모양새가 돋보이지만 그 유질은 이전 시대의 것만 하지 못하다.

  전시의 끝에 다다르면 볼 수 있는 거대한 매병들도 역사적 태동의 산물이다. ‘청자상감 용문 매병’은 이전 세대와 달리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는 고려가 원의 지배 하에 있던 당시 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매병에 그려진 용 역시 중국의 도기 제조소인 ‘경덕진요’, ‘용천요’ 등에서 나타나는 용의 특징과 매우 흡사하다. 용은 전통적인 고려의 용에 비해 몸집이 크며 날카로운 발톱이 강조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청자상감 용문매병’은 당시 고려를 지배했던 원의 문화가 어떻게 고려에 스며들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고증인 것이다. 이처럼 청자는 사실상 고려의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

  전시를 관람한 박상진(51·남·서울시 광진구)씨는 “청자 조각 하나하나에서 고려의 숨결이 느껴진다”며 “이렇게 많은 고려의 청자 조각이 이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었다는게 놀랍다”고 말했다. 이지영(인문·17)씨 또한 “학교 입학 후 박물관에 처음 왔는데 이렇게 대규모 전시를 해서 놀랐다”며 “역사의 흐름과 청자를 함께 볼 수 있어서 뜻깊었던 전시”라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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