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바빠서 자주 보지 못했던 친구들과 밤새 수다를 떨 기회가 있었다. 다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온 상태라 피곤했지만, 우리는 먹을 것을 잔뜩 사들고 와서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가게에 진상 손님이 왔는데 반말이 너무 기분이 나빴다, 손님이 말도 안 되는 할인을 요구하더라, 가게 마감시간이 넘었는데도 손님이 계속 앉아계셔서 난감했다는 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겪었던 설움들이 속속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공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손님과 아르바이트생이라는 관계에서 우리는 완벽한 ‘을’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지상파 뉴스부터 인터넷 기사, 광고, 심지어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갑질’이라는 주제를 종종 다루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갑질’이란 갑을관계에서의 ‘갑’에 접미사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나는 20살 이후로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해 왔다. 프랜차이즈 홀서빙부터 시작해서 학원 보조, 편의점, 과외, 치킨집, 빵집까지 업종도 참 다양하다.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장님과 아르바이트생, 아르바이트생과 손님, 모두의 관계에서 나는 ‘을’이었다. 내가 첫 알바를 그만 둔 이유는 손님에게 성희롱 당한 게 너무 화가 나서였다. 내가 아무리 하소연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무시해’였다. 술을 파는 가게에서는 술을 마시는 손님들을 감당하기가 힘들었고, 심지어 술을 팔지 않는 가게에는 술을 마시고 와서 행패부리는 손님들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었다. 반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화도 나지 않는 수준이다. 내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갑질’이 나 같은 아르바이트생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2014년 ‘땅콩회항’ 사건부터 시작해서 최근에는 프랜차이즈 피자집, 제약회사 회장님들까지 ‘갑질’ 논란에 휘말렸다. 뿐만 아니다. 아파트 주민들까지 경비원 아저씨들에게 ‘갑질’을 한다. 대기업 오너들부터 서민들까지, 대체 그들이 갑질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나는 이들이 ‘관계’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관계는 곧 권력관계, 상하관계일 뿐인 것이다. 상대를 자신보다 낮은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이런 비뚤어진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생각하는 갑을 관계는 사실은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할 뿐인데 말이다.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모두 갑과 을의 관계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매 순간 누군가의 ‘갑’이고 ‘을’일지도 모른다. 가게에 와서 갑질‘하는’ 진상 손님도 자기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갑질 ‘당하는’ 사람일 지도 모르는 일이다. 뉴스에 나오는 ‘갑질’, 마냥 TV 속 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가까이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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