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공감하지 않길 바라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일

  얼마 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성희롱 경험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중학생 때 같은 반 남학생 몇 명이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치마 속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를 오므리자 눈이 마주쳤는데, 그들은 당황한 표정 대신 미소를 보였다.

  이후로 나는 더울 때나 추울 때나, 치마를 입으나 반바지를 입으나 속바지를 꼬박꼬박 챙겨 입는다. 아마 그들은 자신이 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가해자는 잘살고 있는데 피해자는 8년도 더 지난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 불편함을 감수한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분노하고, 답답해하다 끝내 눈물을 보였다. 나를 대신해 눈물을 흘리는 줄 알았으나 단순한 답답함의 분출은 아니었다. 어렵게 떼진 입술은 똑같은 경험을 들려줬다. 골목길에서 치한이 따라와 자신의 성기를 보여준 이야기, 어릴 적 낯선 아저씨에게 추행을 당한 경험들이 적막을 속속히 채웠다.

한두 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명이면 한 명, 열 명이면 열 명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세부 내용은 다르나 똑같은 피해 경험을 말한다. 단 한 명도 “난 그런 경험 없는데”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추행 경험만큼이나 가슴이 섬뜩한 것은 피해자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공감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에 모두가 공감한다.

  얼마 전 모 회사의 전 회장이 여직원을 성추행해 파문이 일어난 바 있다. 피해 여성의 구조 요청을 듣고 도와준 여성들을 ‘꽃뱀’으로 매도하는 댓글을 읽으며 빈번한 성희롱과 성추행 경험에 비해 수면 위로 드러난 피해사실이 현저히 적은 이유를 다시 생각해본다.

  어린 마음에, 생각이 짧아, 피치 못하게 ‘실수’를 범했다는 사과와 덧붙여 ‘그러게 왜 그랬냐’는 첨언이 상처를 키운다. 다음부터는 속바지를 꼭 착용하라는 말,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하라는 말은 진심 어린 걱정보다는 내 탓으로 들린다. 그런 말을 지속적으로 듣다 보면 은연중에 내 탓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첨언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차라리 입을 다물게 된다.

  실체 있는 위협이고 존재하는 피해자 앞에서 양비론을 펼쳐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성희롱 및 성추행 피해자는 말 그대로 2차 가해를 당하는 셈이다. 피해 사실을 알리는 당연한 처사조차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요즘도 종종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무분별하고 맥락 없이 사용되는 성희롱 및 성추행 장면을 접한다. 그때마다 필자는 살면서 겪어온 무수한 성희롱 경험을 떠올린다. 가해자도 매체가 여성을 다루는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단순히 본인의 흥미를 충족하기 위해 나와 우리를 대상화했을까.

  성희롱 피해자인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아무도 내 경험에 공감하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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