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을 옥죄여 오는 것이 하나 있다. 미묘한 피로감.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팀 프로젝트, 과제, 발표는 휘몰아쳐 온다. 서둘러 끝내고 나면 다시 기말고사가 다가올 것이다.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뭔가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시작한 대외 활동, 동아리 활동은 우리를 더욱 빈틈없게 만든다. 친구들과 약속도 잡아야 하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해야 한다. 그러한 와중에도 자신의 장래에 대해 혹독하게 고민하기를 강요받는다. 혹자는 이러한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명한다. 

  최근 2주간, 필자의 지인 2명은 중도 휴학을 했다. 휴학 계획이 있다고 말하는 친구들은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누군가는 이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비난할지 모르겠다. “중도 휴학은 견디지 못한 이들의 중도 포기야” 혹은 “주어진 과제는 미리 해야지” 라며. 하지만 왜 ‘견뎌야’ 하며, 감히 그들의 휴학을 ‘포기’라고 명명할 수 있는가? 또한 왜 우리는 그러한 ‘의무’를 부여받았으며 그것들을 미리 해 놓아야만 하는가? 

  일상 속에서 부여받는 수많은 의무들은 ‘경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평가’에 토대를 둔다. 학점 경쟁, 스펙 경쟁 등 사회의 수많은 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타의 혹은 자의로 많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거나 좌절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의를 가장한 타의에서 시작되는 ‘경쟁 사회’가 너무나 버겁고 힘들다. 경쟁이 주는 피로감에 지쳐버렸다. 그래서 잠시 쉬는 것이다. 휴식을 하는 동안에 뭔가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예전만큼 지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할지라도, 그들의 결정은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다.

  어찌됐든 그들은 휴학을 끝내고 학교로 되돌아온다. 다시 평가의 굴레에 자신의 온 몸을 맡긴 채 열심히 발을 구를 것이다. 굴레의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망각한 채 묵묵히 주어진 일들을 해나갈 것이다. 낯선 곳에서 지쳐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으로, 휴식을 갖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로 남게 된다. 이후 우리들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사회는 우리에게 단순히 ‘열심히 하기’만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청춘들은 오늘도 발이 퉁퉁 불어터지도록 힘껏 걸음을 옮긴다. 사회가 바뀌지 않는 이상 굴레는 없어지지 않는다. 쌓여가는 피로감은 앙금처럼 뭉쳐 청춘의 마음을 더욱 무겁고 지치게 만든다. 청춘은 점점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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