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반대하는 것이죠?”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녁 산책을 하며 대선 토론회 음성을 듣기 위해 이어폰을 꽂은 순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질문과 답변이 들려왔다. 다른 단어를 ‘동성애’로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서 인터넷을 켜 확인해봤지만 내가 이해한 바에는 한 치의 오류도 없었다. 

  여자임을 반대할 수 있는가. 동양인임을 반대할 수 있는가. 누군가의 정체성을 반대한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혹자는 군대 내 동성애를 반대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며 발언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성폭력이 누군가의 성적 지향 때문이 아닌, 위계와 권력관계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군대 내 성폭력에 반대할 수는 있어도, 군대 내 동성애에 반대할 수는 없다. 군대 내 이성애를 반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제는 대통령이 된 문재인 당시 대선후보는 본인의 발언을 사과했지만 그 여파는 쉬이 사그러들지 않았다.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동성애를 할 자유가 있다면 동성애를 반대할 자유도 있다’, ‘이제는 성소수자의 편을 들지 않겠다’는 둥, 익명성에 기대 퀴어의 존재를 부정하는 혐오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교내에는 퀴어 혐오를 비판하는 자보가 붙었다. 그리고 찢어졌다. 대부분 퀴어 인권에 관해 아주 당연하고 기본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퀴어는 찬반의 대상이 아니라거나, 지금 이곳에 함께 존재한다는 지당한 사실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손짓 몇 번에 찢겨 나갔다. 이러한 행태를 보면 ?여성 해방의 터전인 이화?라는 구절이 과연 퀴어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 의심된다. 

  이번 사태를 보며 우리나라에서 퀴어혐오가 가시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혐오의 부재 때문이 아닌 퀴어 존재의 부정 때문임을 절감했다. 퀴어의 존재는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가차없이 공격 당한다. 예컨대, 퀴어의 목소리를 내는 행사인 퀴어 퍼레이드에 대해서는 “차별받는 사실은 알겠으나 조용하고 얌전하게 퍼레이드를 진행하라”며 시혜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권력을 지닌 사람의 성찰 없는 발언이 대중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닌 것인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이들은 대선 토론회를 계기로 혐오발언에 대한 허가증이라도 받은 듯이, 속에 담아두기만 하던 혐오를 마음껏 방출했다. ‘동성애를 반대한다’, ‘싫어한다’는 당시 대선후보들의 발언에 편승해 자신들의 혐오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이 자신의 행동과 내면을 검열하고 고찰해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대중에 알려진 사람이 전파를 통해 혐오를 전달한다면, 대중은 이를 혐오의 표출을 허락하는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자신과 일반인들의 발화가 동일선상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것이 누구에게나 마땅히 보장돼야 할 천부인권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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