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리는 우연과 필연 사이를 오가며 도달하는 것

  무릇 사람은 뜻대로 가르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다. 스스로 가르치고 스스로 배운다. 개성과 재능과 취향, 그 밖에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계기들이 그 가르침과 배움을 결정한다. 사람들은 인생도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계기들로 선택한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야 -기억작업을 통해- 그렇게 험난한 길을 지나온 자신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계기가 필연과 운명이었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재능이 무척 뛰어난 젊은이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는 안타깝게도 그 재능을 발현할 학문의 길을 개척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선 환경이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는 그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로 주저하거나 포기하고 결국 다른 길을 택한다. 반면에 그 젊은이에 비해 재능이 부족한 다른 젊은이는 용감하게 또는 우직하게 그 학문의 길을 택하고 결국 학자와 교수로서 성공한다. 이것을 운명이라고 한다. 즉 우리는 재능과 개성을 각자 다르게 갖고 태어나고 또 그것들을 가꾸어오지만 어떤 계기나 이유에서든 그것들을 발현하지 못한 채 주변 사람들이 예상한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본다. 학자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그 길을 포기하고, 반대로 그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학자가 된다. 어찌 학자와 교수만 그러겠는가. 스스로 태어나고 가꾼 재능과 나중에 도달한 직업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지만, 이것이 수수께끼 같은 삶의 법칙이라는 데 사람들 사이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 합리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자본주의 체제, 대중의 변덕도 한 몫을 한다. 소망, 개성, 재능, 운명이 서로 좌충우돌하면서 진행하는 삶의 게임에 우연이라는 계기가 끼어들어 모든 걸 뒤섞고 바꿔놓는다. 안타깝게도 진짜가 사라지고 가짜가 그 자리에서 진짜 행세를 한다. 그 가짜는 자신이 진짜라고 믿고 세상도 그가 진짜라고 믿는다. 진짜를 알아보지 못하고 내쫓는 대중. 그 대중은 스스로 깨어나고 싶어 하기보다는 외려 속고 싶어 하고, 합리성보다는 카리스마를 좇고, 냉철하게 판단하기보다 쉬 데마고기에 휘둘린다. 히틀러도 그렇게 등장했다. 오늘날은 다를까? 미국의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대중의 힘 때문이다. 독일은 대안당(AfD)이 약진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하고 있다. 프랑스도 마리 르펭이 이끄는 국민전선이 약진하고 있다. 이제 세계는 히틀러와 같은 이가 다시 등장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준비가 돼 있다. 사람들의 이기심이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뻔히 보이는 손으로 작용하고, 사람들은 그 손이 리바이어던의 손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 손을 잡는다. 전 세계의 민주주의가 오늘날 도달한 길이다. 히틀러가 그랬듯이 트럼프도 게임의 규칙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집요하게 이용해 대권을 거머쥔 것이다. 민주주의의 상징인 미국은 알고 보면 이러한 이상한 시스템과 로비가 민주주의를 뒤흔드는 나라, 여성과 소수자를 혐오하고 박해하는 백인 중산층 남성들이 지배하는 나라, 결코 민주주의의 모범이라고 할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런 현실을 일단 냉철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운명처럼 보이는 것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삶이라는 수수께끼가 아닌가.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