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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걸 없다고 하면 없어지나요?
2017년 03월 27일 (월) 이명진 사진부 부장 myungjinlee@ewhain.net

  “그래서 너희 학교가 사회에서 지탄받는 거야

  학부생의 얕은 지식으로나마 페미니즘에 관해 일장 연설을 펼치자 엄마가 느닷없이 학교를 비난했다. 대단히 과격한 말이라도 했나 하면, 그렇지도 않다. 엄마에게 한 말이라곤 여성은 아직 다방면에서 여성혐오를 겪고 있다는 정도의 얘기뿐이었다. 왜 애꿎은 학교를 탓하냐며 언쟁을 펼친 끝에 상황은 일단락됐지만, 아직도 가족은 내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직접 겪지도 않는 일들에 왜 이렇게 신경을 쓰냐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로 보지도 못하고 겪지도 않았을까. 유치원생 때 아는 언니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젊은 남자가 언니의 가슴을 만지고 도망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편의점에서 물건을 계산하는데 뒤에서 한 할아버지가 아주 자연스럽게 엉덩이를 주물렀다. 학창시절 내내 학원이나 캠프 등에서 만난 남자 선생님들이 뽀뽀를 해달라고 했다. 신고할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에 이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여성은 이렇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범죄에 노출된다. 

  얼마 전 일이다. 비가 세차게 내리던 어느 새벽, 술 취한 남자가 성기를 노출한 채로 신촌에서 이대까지 나를 쫓아왔다.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은 뒤 경찰에 신고했다. 

  끔찍한 경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모두 한 마음이라도 된 듯 2차 가해를 시작했다. 경찰은 진술 과정에서 그 남자가 어느 쪽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만졌는지 등을 물어봤다.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을 돌이켜야 하는 상황은 또 다른 폭력이었다. 또, 가해자가 아닌 대리인과 합의를 진행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결국 가해자에게 전화번호가 유출돼 직접 연락을 받았다. 가해자가 나의 신상정보를 알고 있다는 점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엄마는 합의 없이 넘어가자고 설득했다. 그가 복수심으로 더 큰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며 대리인과도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피해자가 2차 피해를 걱정하는 상황이 모순적이었다. 성추행을 당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과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것은 난데 제삼자가 내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합의 여부를 결정하는 상황이 불쾌했다. 걱정돼서 한 말이겠지만 피해자로서는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냐’는 말처럼 들렸다.

  합의 여부를 두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가해자 측과 연락이 끊겼다. 경찰은 사건 진행 과정을 더는 말해주지 않고 있다. 합의는 흐지부지됐고 남은 건 그날의 끔찍한 경험과 2차 가해로 인한 상처뿐이다.

  이 모든 일을 알면서도 가족은 물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직접 겪지도 않는 일들에 왜 이렇게 신경을 쓰냐고.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보지 않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다. 페미니즘에 눈을 뜬 사람이 늘어날수록 억지로 눈을 감는 사람 역시 많아지고 있다. 검찰의 2016년 범죄분석에 따르면 강력범죄(흉악) 피해자 중 약 84.3%가 여성이다. 여성혐오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혐오범죄는 외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이제는 대책을 강구할 차례다. 눈을 감는다고 현실이 바뀌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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