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외치는 시위가 시작됐다. 학생과 함께 하기로 한 민족대표 33명은 독립선언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하고 스스로 체포됐다. 학생들은 민족대표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학생끼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울역, 이화학당 등을 행진했다. 식민지 국민 중에서도 학생이라는 약자 중의 약자가 시작한 시위는 전국으로 퍼졌고,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는 큰 변화의 시작이 됐다.

  시위가 커지는 과정에서도 그들은 자주독립을 이루는 방법으로 비폭력 만세운동을 선택했다. 목표와 방법에 대한 합의와 공감 아래 시위는 대규모로 불어났다. 신문이나 SNS를 통한 홍보도 불가능했던 시절의 모습이다. 

  98년 후 같은 날, 광화문은 태극기와 촛불로 나눠져 대치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목청껏 주장을 외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대통령의 국정 농단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국가 수장 공석은 국민들의 의견을 모아 빠르게 해결해야 할 상황임에도 의견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모이기 시작하면서 탄핵 심판도 힘겹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본교도 총장 부재라는 크고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본교를 이끌고, 다양한 개혁과 기획을 진행해야 하는 총장이 사퇴했다. 직원노동조합 정연화 위원장에 의하면 직원들은 현상 유지 이상의 기획 진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 위원장은 이 상황이 지속되면서 다른 학교에 비해 계속해서 뒤쳐지고 있다고 걱정했다. 

  그 공석을 매우기 위한 ‘새 총장 선출’을 두고 각 구성원들의 의견이 좀처럼 합의되지 않고 있다. 본교는 총장 선출 규정을 정할 때 구성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못했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4자 협의체를 만들었다. 4자 협의체는 출범 이후 선관위 구성부터 투표 반영 비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점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만 아직 서로의 입장 차를 확인할 뿐 의미 있는 합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총장의 부재는 4개월 째 지속되고, 4자 협의체는 출범한지 한 달이 돼 간다. 구성원이 주장하는 투표 비율은 각자의 입장에서 타당한 비율이다. 학생이 주도한 총장 사퇴 시위이기에 학생의 비율도 혁신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얘기, 직원과 교수의 비율과 실무를 평가할 수 있는 직원의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얘기, 교수가 후보이며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총장을 뽑아왔던 주체가 교수였다는 얘기. 전부 타당하다. 하지만 양보 없는 주장은 본교의 총장 부재 상태를 장기화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3·1 운동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목적 의식과 그를 향한 방법이 합의됐기에 이뤄낸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때처럼 수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98년 뒤 3월1일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마음이 모였던 그 날을 생각하며 4자 협의체, 나아가 전 구성원이 양보하고 나아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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