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은 생소한 실험 하나를 시도했다. 전기가 통하는 우리 안에 개를 넣고 주기적으로 전기충격을 줬다. 이때 개는 우리를 빠져나갈 수 없도록 했다. 그렇게 24시간 뒤, 셀리그만은 개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고 다시 전기충격을 줬다.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음에도 개는 가만히 웅크린 채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했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학습된 무기력’이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해도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 학습된 것을 말한다.

 한국에서 예술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학습된 무기력’을 느낀다. 예술의 길을 꿈꾸는 젊은 학생들에겐 “한국은 안 돼”, “유학은 어디로 계획하고 있냐”는 이야기가 당연하게 나온다. 한마디로 한국에선 예술로 먹고 살기 힘들다는 거다.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예비 예술가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 무기력을 학습하는 게 언제부턴가 일상이 돼버렸다.

 최근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세상에 알려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예술분야 학생들의 무기력을 가중시킨다. 박근혜 정부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정권에 비판적인 예술인이나 단체들을 지원하지 못하게 했다. 문화예술 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저변을 다져야 할 정부가 오히려 뒤로는 문화예술계를 ‘죽이는’ 짓을 하고 있었다니. 오히려 국가적 손실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현업 예술가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서 예술을 하고자 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더없이 치명적인 상처였을 것이다. 

 한국의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단체와 기관의 대처도 실험실 개에게 주어지는 전기충격처럼 무력하다. 23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사과문을 올렸지만, 당장에 정부가 개혁 수준의 변화를 감행하거나, 예술가들의 힘든 환경이 단번에 바뀌리라고는 감히 기대하기 어렵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블랙리스트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던 송수근 장관이 직무대행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무기력하게만 있는 것이 답일까. 이런 시국에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예술가들은 예술 전공생들에겐 한 가닥 빛이다. 블랙리스트를 영광의 명단이라 여기는 사람들,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으면 블랙리스트가 아니라고 정당성을 의심하는 사람들. 이준익 영화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모든 억압은 변화의 시작점”이라며 “정치적 분란, 지원차별, 블랙리스트 현상은 예술계의 급성장을 예고한다”고 말했다.

 광화문 시위에 함께하는 예술 활동을 통해 시민들은 예술에 대한 관심을 갖고, 문화연대는 ‘문화정책 대안 모색 연속 토론회’를 여는 등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지금이 한국을 문화·예술의 강국으로 키울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희망적인 생각이라도 안하면 무엇을 붙잡겠는가.

 이번 블랙리스트로 이 나라 예술가들이 처한 척박한 환경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블랙리스트가 오히려 전국의 예비 예술가들의 무기력을 깨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들이 좌절하지 않고 예술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문화예술계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국민들의 지속적 관심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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