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길목, 문학에 녹아든 한글의 유려함을 읽다
가을이 오는 길목, 문학에 녹아든 한글의 유려함을 읽다
  • 장운경 기자, 전샘 기자
  • 승인 201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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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요즘 현대인의 삶은 외래어와 외국어로 가득하다. 길거리 간판에는 유래를 알 수 없는 외국어가 쓰여 있고,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에는 영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처럼 외래어와 외국어의 홍수 속에서 현대인들은 점차 순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잊어가는 듯 하다. 9일은 한글 창제를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국경일 ‘한글날’이다. 이에 본지는 한글날을 맞아 본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진에게 ‘한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문학작품을 추천받아 잊고 살았던 한글의 소중함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엉덩이는 깠지만(...) 그 어둑시근하고 격리된 고장에선 호들갑스러운 탄성을 지르게도 하고, 옥시글옥시글 재미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도 했다.”(p.24)

"삘기, 찔레순, 산딸기, 칡뿌리......" (p.26)“

“왕개미의 새큼한 똥구멍을 핥아보다가 불개미 떼들한테 종아리를 뜯어 먹히기도 했고,…풀로 각시를 만들어 쪽찌어 시집보낼 때, …"(pp.26-27)

“바람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저녁나절 동무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올 때, 홍시빛깔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이삭을 바라볼 때의 비애를 무엇에 비길까.(p.28)

박완서의 대표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상태 묘사나 심리 묘사에 있어 생동감 넘치는 부사를 활용해 풍성한 표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를 비유와 묘사를 통해 풍성하게 전달하고, 그것을 심리 상태로 연결해 공감을 자아내는 작가의 언어 사용의 묘미가 돋보인다. 작가는 풍부한 어휘력을 구사해 글을 꾸림으로써 한글 어휘의 풍요로움과 표현의 재미와 긴장을 잘 보여준다.

  ‘삘기’, ‘찔레순’, '산딸기'와 같은 토속적인 식생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줘 우리가 잃어버린 산천의 식생들의 이름을 환기시켜준다. '왕개미의 새큼한 똥구멍을 핥아보다가'와 같은 표현은 대상을 표현하는 재미와 문장의 속도감이 돋보이며 동시에 유년기의 놀이와 재래의 풍속을 환기해준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우리말로 쓰인 작품이라고 해서 어려운 작품일 것이라는 편견을 깨는 작품이다. 

-연남경 교수(국어국문학과)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개여울」은 개여울, 홀로이, 풀포기, 잔물, 파릇하다, 해적이다 등 순우리말이 아름답게 펼쳐진 작품이다. 특히 '잔물'이나 '해적이다'와 같은 말은 현대인이 잊고 있는 애틋한 말이다.  우리 말의 아름다움은 단지 단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와 같은 문장에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따져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묻는 게 아니고, 혼잣말이지만 건네는 말이고, 건네는 말인데 혼잣말이다. 그런 문장은 설명하는 말이지만 묻어두는 말이 되는, 오묘하면서도 애연(哀然)한 우리말의 화법 특징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파릇한 풀포기'는 발음만으로도 '포릇포릇' 돋아날 것 같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는 봄바람 같고 개여울 같은 것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정끝별 교수(국어국문학과)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박용래 시인(1925~1980)은 이 작품에서 일찍 세상을 떠난 누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누이에 대한 그리움을 산기슭에 지천으로 피어나 단추 구멍에 달기도 하고, 머리핀 대신 꽂기도 하며, 뿌리를 달여 약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소박한 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작고,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이 누이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다섯 번이나 '사랑'을 반복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애상의 정서에 빠지지 않으면서 시어의 단아함을 잘 유지하고 있다. 특히 '매디매디 나부끼는', '매디매디 눈물 비친' 같은 구절은 작게 흔들리는 구절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간결하고 구체적이면서도 대상에 대한 묘사의 힘을 잘 보여주고 있어 한글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이연승 교수(국어국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