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데 서다’라는 뜻의 중립(中立)의 사전적 정의는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처신함’이다. 꽤 긍정적인 단어들로 이뤄진 이 정의를 보면, 이는 별다른 논란 없이 긍정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의문스럽게도 ‘중립’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극작가 올리버 골드스미스는 “중립은 항상 압제자를 도와주지 박해자를 돕지 않는다”라고 말했으며, 미국의 흑인해방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사회적 전환기에서 최대의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다”라고 말했다. 왜 공정함을 말하는 중립은 이토록 비난받았나? 

  수차례에 걸쳐 폭력을 당하던 사람이 반격을 가하자 “그러면 너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야”라고 다그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 선상에 놓고 바라본다거나, 시비가 분명하게 가려지는 일에도 양쪽의 말을 다 들어야 한다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거나, 약자의 발버둥을 ‘과하다’라는 이유로 비난하는 등의 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이러한 중립은 사실상 진정한 중립의 의미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이들 대부분은 사실 중립이 아닌 ‘방관’에 더 어울린다. 방관(傍觀)이란 곁에서 본다, 즉 어떤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곁에서 보기만 한다는 뜻이다. 가운데 서 있는 것과 곁에서 바라보는 것은 다르다. 양 극단을 주장하는 의견들의 가운데 서기 위해서는 양쪽 의견을 모두 완전히 이해하고 그를 절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반면, 곁에서 바라본다면 어떤 의견도 자세히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를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서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결국 협소한 시각에서 어느 한 쪽에 가깝게 가기 쉽다.

  비난의 대상이 되는 ‘중립’의 또 다른 모습은 마틴 루터 킹의 연설에서도 나타난다. 마틴 루터 킹은 “흑인들의 자유를 향한 길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흑인혐오세력이 아닌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듯이 행동하는 백인 온건주의자들이다”고 말했다. 백인 온건주의자들은 진정한 평화가 아닌 그저 겉보기에 질서정연한 소극적 평화를 선호하며, 좀 더 괜찮을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말한다. 조금 과감하게 말하자면,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현실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강자의 편에 서겠다는 말과 같을 수밖에 없다. 저울이 수평을 이루고 있더라도 땅이 강자의 편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저울 역시 강자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므로 진정한 수평을 이루고 싶은 중립자라면, 기울어진 땅에선 약자의 편이 되어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심판을 비난하진 않는다. 다만, 그른 일에도 침묵하고 공정한 척하는 심판을 비난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기울어진 땅 위에서 저울의 수평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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