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퀼트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순희 관장 김수연 기자 mangolove0293@ewhain.net

  “덕혜옹주와의 인연으로, 전시에 이어 유품 환수에 도움이 돼 더 없이 기쁘고 마음 한 켠에 자리했던 짐을 던 기분입니다”

  2일 오전9시 서울시 중구 남산동에 위치한 초전섬유·퀼트박물관에서 김순희(교육학·55년졸)관장을 만났다. 김 관장은 국내 유일 섬유예술 작품 박물관의 설립자이며 우리나라 섬유예술 분야 선구자 ‘편물명장 1호’이다. 최근 관객 500만 관객을 돌파, 흥행가도에 오른 영화 ‘덕혜옹주’의 주인공 덕혜옹주와 김 관장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김 관장과 덕혜옹주의 인연은 고종의 넷째 아들 영왕(이은)의 부인, 이방자 여사와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이 여사는 영왕이 평소에 염원한 사회사업의 유지를 받들어, 1967년 사회에서 소외되고 혜택 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교육을 위해 ‘명휘원’이라는 기관을 설립했다. 당시 김 관장은 기술학습, 교양과목과 같은 교육 중 편물 교육에 도움을 주며 명휘원에 함께 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 여사께서 낙선재 뒤뜰에 철쭉이 예쁘게 피었다는 말씀에 제가 구경을 요청했어요. 그때 낙선재 뒤뜰에서 철쭉을 구경하고 있는 덕혜옹주를 처음 만나게 됐어요. 이 여사께서는 거동이 불편해 뒤뜰 이외에는 나갈 수 없었던 덕혜옹주를 항상 걱정했었어요. 덕혜옹주를 각별히 여기는 이 여사의 마음에 감동받은 저는 이후 이 여사의 마지막 소원인 <조선왕조궁중의상> 책자 발간에 힘쓰게 됐죠.”

  덕혜옹주에 대한 그의 관심은 책자 발간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덕혜옹주가 일본에 가면서 가져간 조선왕실 전통 복식과 장신구 등을 전시하는 ‘덕혜옹주 탄생 100주년과 환국 50주년 기념 전시회’(덕혜옹주 전(展))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릴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줬다. 김 관장이 덕혜옹주의 유품이 보관된 일본 문화학원 복식박물관의 오오누마 스나오 이사장을 오래 설득한 끝에 덕혜옹주의 유품이 국내에 들어올 수 있던 것이다.

  “제가 그에게 덕혜옹주 전을 한국에서 개최하자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제안했지만 쉽게 승낙을 받을 수 없었어요. 유품 전시 후에 환수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했었던 것이지요. 운 좋게도 오오누마 스나오 이사장은 우리나라 문화재청에서 나온 책을 본 후 전시를 승낙했어요. 그 이후로 덕혜옹주 전을 비롯해 작년 6월 덕혜옹주 유품 7점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죠. 그 때가 제 인생에 있어서 큰 보람과 감동의 시간이었죠.”

  김 관장의 편물인생은 어느덧 60년을 앞두고 있다. ‘편물명장1호’, ‘국무총리상’, ‘은관문화훈장’ 등 섬유예술의 대가가 된 김 관장이지만 그의 길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종가가 있던 경북 안동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농한기를 맞아 시간을 보내는 젊은 또래에게 뜨개질을 추천할 만큼 뜨개질에 관심이 많았다. 본교 사범대학에 입학한 그는 교생실습 때 편물 사랑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처음 교생실습에서 학생들과 밤낮을 지새우며 편직 전시회를 준비했었어요. 그런데 전날 도둑이 들어 고생해 만든 모든 작품들을 훔쳐갔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그동안 연습했던 작품들, 학생들 작품 중 좋았던 것들을 위주로 모아서 잘 마무리 됐어요. 그때 제 손재주가 가장 많이 늘었고, 학생들과 뜨개질하면서 편직에 대한 꿈을 구체화했어요.”

  그러나 집안과 그의 편물 사랑은 크게 부딪히기도 했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으로 유학을 가려던 차에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워진 것이다. 결국 김 관장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편물 작업으로 학비를 준비하려 했다. 종갓집이었던 김 관장의 집안의 모든 윗분들은 가문의 체통을 지켜야지 웬 상업이냐며 끊임없이 혼을 냈다고 한다. 김 관장은 3년만 일하고 그만하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편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제 좌우명이 삼침기법(三針伎法)이에요. 첫 번째 뜸은 세 번 잘 생각하기, 두 번째 뜸은 세 번 잘 참기, 마지막 뜸은 3년간 최선을 다하면 성공하여 뜻을 이룬다는 의미가 있어요. 가족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편물작업을 3년만 하겠다는 약속이 어느새 60년째가 되어가네요. 그 바느질 한 땀에 묻어있는 가르침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했지요.”

  김 관장의 50여년 간 살아온 사택을 직접 개조해 만든 초전섬유·퀼트박물관은 1998년 10월 국제 퀼트 콘테스트의 개최와 함께 개관한 섬유박물관이다. 우리나라 전통 조각보 2백여 점과 해외 퀼트 2백여 점으로 구성된 소장품으로 연중 상설전이 열리고 있다. 현재 박물관에선 조선왕조 궁중의상과 세계의 민속복식, 전통자수 및 보자기 등이 전시 되고 있다. 김 관장은 전시장에 있는 옛 우리나라 복식 중 저고리와 치마의 아름다움을 설명했다.

  “지난 1963년 코코샤넬 패션쇼를 갔을 때, 제가 입고 있던 옥색저고리와 남색치마를 샤넬이 멋있다고 말했어요. 한복 저고리의 브이넥과 넓은 팔통이 개성적이면서도 아름답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또한, 우리 한복은 어떤 저고리와 치마를 함께 입어도 조화롭기에 한껏 더 고와 보이는 것 이지요”

  이어, 각국의 퀼트 작품과 복식에 수놓은 무늬를 보여주며 하나하나 말했다. 김 관장은 “라오스의 전통 복식을 보면 무수히 많은 천을 바느질해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다”며 “우리나라 복식에도 천 조각 백 개를 이어 붙여 만든 것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시된 보자기를 보여주며 그 숨어있는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한복의 옷자락은 곡선인데, 우리나라 옛 사람들은 옷을 수선하고 남은 자투리 천을 가지고 모아 보자기를 만들었다"며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있던 자투리 천은 한손에 모아지게 되고, 이는 모든 모나고 네모난 것들을 허물없이 감싸는 어머니의 마음과도 같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퀼트 체험프로그램, 퀼트 문화 알리기 위한 봉사활동 등도 진행 중이다. 그는 “명휘원에서 장애 여성들을 위해 일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오늘날까지도 박물관에서도 사람들에게 나의 재능을 가지고 교육하고 있다”며 “이화의 여성들도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전하면서 나눔의 정신을 잇는 훌륭한 여성들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 관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조각보와 퀼트 문화를 견고히 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며 세계 각국에 우리나라의 퀼트 문화를 알리고 있다. 당장 그는 6일부터 새로운 전시를 연다. 마지막으로 그는 퀼트를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며 이를 통해 배운 삶의 지혜를 전했다. “실이 엉키면 바로 자르려 하지 말고 잘 풀어서 정리를 해야 합니다. 즉, 자신의 삶에 엉킨 부분이 있다면 시간을 두고 참으며 잘 풀어나가세요. 그러면 자신 또한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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