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있는 SNS인 페이스북에는 ‘좋아요’라는 기능이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이 게시물이 좋아요’라고 표현하는 기능이지만, 요즘에는 ‘공감’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기도 한다. 누군가 개개인의 일상이나 생각, 인간관계, 사회 소식 등등 생활 전반에 대한 글귀 등을 게시하면 그에 공감한다는 의미로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다. 이렇게 공감을 산 게시물은 다른 이들의 뉴스피드에 노출되고, 또 다른 누군가를 게시물에 태그하여 불러들이는 행위로 쉽고 빠르게 전파되면서 많게는 수십만개의 공감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공감하고 있던 행동방식들이 어느새 나의 삶에 새로운 규제를 만들어내고, 나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이 있었다. 그 계기는 친한 친구와 그냥 친구에 대해 수많은 좋아요를 받은 게시물이었다. 게시물은 ‘친한’ 친구와 ‘그냥’ 친구를 대하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행동들을 비교하는 내용으로, 그냥 친구에겐 수다스럽고, 친절하고, 살갑게 행동하는 반면 친한 친구들에겐 편한 만큼 불친절하고, 무뚝뚝하고, 막 대한다는 것을 동영상으로 재치 있게 그려내면서 나 역시 좋아요를 누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었기 때문일까, 어느새 그 내용은 공감을 넘어 친구라는 존재에 대한 나의 행동 방식을 규정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그냥’ 친구와 ‘친한’ 친구라는 프레임에 갇혀 상대를 대하고 행동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지난 7월, 친구들과의 유럽 여행에서 갑작스레 폭동이 일어나 난생 처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위험한 사건을 겪은 후, 무뚝뚝하고 무심하고 불친절하던 사이를 ‘친한 친구’라고 포장하던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따듯한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서로를 다독이는 친구들은 친절하고 살가운 ‘그냥’ 친구로 상징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친한’ 친구였고, 어쩌면 전보다 더 돈독해진 사이였다. 이렇게 내가 갇혀있던 행동 방식에서 벗어나고 보니 수다스럽고, 친절하고, 살갑게 대하던 친구들도 ‘그냥 친구’가 아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공감, 그리고 그 공감이 만드는 행동 방식은 친구 관계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생각해보면 ‘여행은 이러해야한다’, ‘이럴 때 싫은 사람 유형’, ‘이렇게 입는 사람이 좋다.’ 등등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틀에 나를 맞추려고 했던 것들이 적지 않다. 결코 그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행동 방식에 따르는 삶은 다른 이들의 질타에서 멀어질 수 있는 삶이며, 다른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이기에 나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나는 어느새 스스로의 행동에 새로운 제약을 만들어 냈다. 수많은 콘텐츠가 그려내는 여성상, 남성상, 바람직한 인간상에도 모자라 이제는 사소한 생활 방식 곳곳에 틀을 만들어 우리 스스로를 가둬왔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의 의견도 그것에 공감하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제약이 될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공감이 가지는 이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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