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산행’(2016)을 본 누적 관객 수는 23일을 기준으로 11,278,732명이다. ‘부산행’은 전대미문의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이는 부산행 KTX 안의 상황을 그린 영화이다.

  이 영화가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우리나라 최초의 좀비 버스터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 좀비를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순수성을 잃고 타락한 현실 세계의 단면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다.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좀비를 끌어들임으로써 현실을 확장하여 우리 사회의 결점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이다.

  ‘부산행’에서는 KTX라는 폐쇄적인 공간을 주된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 공간 속에는 또 하나의 사회가 형성된다.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좀비로 변하는 것은 인간성의 상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좀비로부터 인간성을 지킨 사람들조차 결국 인간으로 말미암아 타락해버린다. 

  남을 밟고 올라가야만 얻어지는 성취감, 자신의 것을 나누려 하지 않는 욕심, 자신만 잘 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아픔은 개의치 않는 이기심. 오로지 앞만 보고 전속력으로 달리다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게 된 각박한 세태는 좀비가 생명을 앗아가는 극한의 배경을 만나 관객들에게 크게 와 닿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청춘들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남보다 잘 해야 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자신의 행복을 남의 불행에서 찾아야만하는 상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좀비에게 다른 사람을 던지는 영화 속 장면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앗아간다고 진정으로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결말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바로 ‘순수로의 회귀’이다. 때 묻지 않은 생명을 지닌 임산부와 그녀가 지켜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들은 남의 삶을 감싸 안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향해 걸어간다.

  결론적으로 인간이기를 거부한 타락한 세상을 구할 유일한 방법은 순수함인 것이다. 그 작은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 아픔에 둔감해져도, 그에 비춰 행복을 찾아서도 안 된다. 상대적인 삶이 아닌 개개인의 절대적인 삶을 함께 껴안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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