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화에는 수많은 자매동문과 모녀동문이 있다. 올해 신입생을 기준으로 자매 동문은 46명, 모녀 동문은 140명, 3대 동문은 18명으로 모두 204명의 가족 동문이 있다. 뿐만 아니라 창립 122주년을 맞아 진행했던 ‘특별 이화가족 찾기 행사’에서 다섯 자매 이상 동문 가족이 12가족 선정됐고, 그 중 6자매 동문 가족은 2가족, 최대 7자매가 모두 본교를 졸업한 가족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본지는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이화의 특별한 동문 가족을 소개한다.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 자매 동문이 있다. 유예환(사학·11)씨와 유가환(사회·13)씨 자매다. 유가환씨가 이화에 합격하고 두 자매의 부모님께서 “너희가 결국 대학까지 같은 곳에 다니는구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함께하는 유씨 자매에게 이화에서의 추억을 들어봤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함께
지난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에도 언니와 같이 교양 수업을 듣고 있는데, 이게 가장 특별한 기억인 것 같아요. 지난 학기에 같이 들은 ‘무용의 이해’ 수업에서 무용 공연을 보는 과제가 있었는데 과제를 하기 위해 언니와 같이 공연도 보러 갔다 왔죠. 하루는 같이 수업을 빠지고 금요일~일요일 주말을 이용해 도쿄 여행을 갔다 오기로 했어요. 설렘 반 기대 반이었는데 잊지 못할 대학 시절의 추억이 된 것 같아요.
또 가끔 제가 밥을 안 먹고 나왔을 때나 뭘 놓고 나왔을 때, 쉬는 시간에 잠깐 만나서 제가 놓고 온 것을 전해줄 때 언니가 의지가 돼요. 특히, 배고플 때 언니가 와서 먹을 것을 주고 가면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참 고마워요. 주로 수업을 듣는 건물도 학관과 이화·포스코관으로 가까워서 가끔 만나면 인사도 하고 학교에서도 종종 만나요.

-언니가 전한 이화의 이미지
언니와 두 학번밖에 차이가 안 나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어요. 언니가 이화의 벗들은 다들 겉으로는 시크해보이지만 속은 따뜻한 사람들이 많다고도 했고, 다들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대학생활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얘기해 준 것이 기억나요. 
사실 제가 여중-여고-여대 라인이라서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을 경험해보고 싶어 여자대학에 가기 싫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언니가 이화의 좋은 모습을 알려주고 학교에 다닐수록 이화가 더 좋아졌던 본인의 경험을 얘기해줘서 제가 입학 전부터 이화에 대해 잘 알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든든한 가족이자 선배
사실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내신 성적관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 대학에 올라와서도 학점관리에 대한 불안이 컸어요. 그런데 언니가 대학에는 놀기도 잘 놀면서 공부도 잘하는 사람이 많다며 새내기 때 학점관리가 중요하니까 너무 놀지 말고 시험 기간 때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언니는 그렇게 못했다면서 저에겐 꼭 열심히 하라고 조언해줬죠.

-자매의 보금자리, 이화
이제 학교가 정말 편하고 항상 든든하게 우리를 지지해 주는 것처럼 느껴져요. 특히, 학교 앞에서 오랜 시간동안 자취 생활을 했더니 정말 집처럼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 미래의 우리 가족에게도 이화를 추천하고 싶어요. 저 같은 경우 이화에 입학하기 이전보다 지금 더 많이 성장했기 때문이에요. 이화를 통해서 자립심도 배웠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으며, 좋은 교수님들의 수업을 통해서 많은 지식을 얻기도 했어요. 이화는 여성에게 있어 최고의 베이스캠프라고 생각해요. 

  이화에는 30년 전, 어머니가 섰던 연주 무대에 시간이 흘러 딸이 같은 무대를 연주하는 특별한 추억이 있는 가족이 있다. 어머니인 나윤경(성악·90년졸)씨와 딸 김희원(성악·13)씨는 음대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프랑스 가곡 연주회'에서 노래한 사진을 보여주며 모녀의 이화를 소개했다.   

-성악과 모녀 선후배
어머니께서 제가 성악과에 입학한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생각하셨어요. 또 어머니의 동창분들도 저희가 모녀 동문인 것을 부러워한다고 하셨죠.?특히 우리 가족은 친가 외가를 불문하고 여자는 다 이화 출신이어서 다들 제 입학을 더욱 반겨주셨어요.

-30년의 시간을 이어주는 가미 분식과 오리지날
합격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이대 앞 학교 구경을 왔었어요. 그때 어머니와 ‘가미 분식’과 ‘오리지날’에서 밥을 먹으며 어머니의 학창시절 그곳에서 식사하셨던 이야기를 들었죠. 지금은 학교 앞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가미 분식과 오리지날 만큼은 30년 전 그 자리에 있는 식당이어서 어머니와 추억을 공유할 수 있었어요.

-또 한 분의 선생님
제가 성악을 늦게 시작한 편이라 대학 입시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는데, 어머니께서 도움을 정말 많이 주셨어요. 집에서 선생님과 합숙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입시 때는 일상이 레슨이었죠. 여전히 어머니께서는 연습하시고 새롭게 깨달은 점들을 매일 제게 알려주시기도 해요. 아무래도 어머니와 같은 전공이다 보니 노래할 때나 무대에 설 때의 어려움, 필요한 부분을 잘 아시고 많이 챙겨주셔요.

-같은 전공, 다른 캠퍼스
어머니께서 학교에 오시고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그땐 삼삼오오 스탠드에 앉아 햇볕을 즐기던 운동장이 지금은 웅장한 ECC 건물로 바뀐 것이나, 조그만 정문에 다리가 있어서 그 아래로 기차가 지나다녔던 것이 이젠 사라지고 탁 트인 모습으로 바뀐 것이라고 하셨어요. 또, 30년 전 당시 음악대학(음대)에는 생협이 없고 음대와 중앙도서관 사이에 작은 매점이 있었는데, 음대 건물이 다른 건물들과 거리가 있다 보니 수업을 들으러 이동할 때면 그 앞에서 컵라면을 사서 5분 만에 후루룩 먹고 수업을 들으러 달려가셨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리고 어머니 때는 레코드판으로 녹음된 곡들이 많지 않아 들으면서 공부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는데 지금의 음악도서관은 정말 놀랍다고 하셨어요. 음악도서관이 국내 모든 대학 가운데 가장 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 됐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말씀하셨죠.

당시 어머니께서 학교에 다니시던 시기에는 학생시위가 많아 늘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지나다니던 학생들도 눈물 콧물을 쏟으며 다녔는데, 이제는 다른 어느 학교보다도 평화로운 캠퍼스 분위기가 이뤄져 있어 보기 좋다고 하셨어요.

-모녀를 이어준 이화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결혼하시게 된 것에 이화가 큰 역할을 하기도 했어요. 부모님이 양가 부모님으로부터 결혼을 허락받을 당시 두 분이 학생이어서 허락받기 어려울까봐 걱정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놀랍게도 상견례 자리에서 만나신 저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께서 본교 법대 동창으로 대학 시절 단짝 친구셔서 두 분의 결혼이 수월하게 진행됐대요. 아직도 제 할머니들께서는 만나시면 서로를 “정헌아”, “승옥아” 하고 이름으로 부르시며 대학 시절로 돌아가신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곤 하세요. 저에겐 엄청난 학교 선배님들이시죠.

  본교에는 7자매가 모두 이화를 졸업한 가족이 있다. 바로 이미영(사회·70년졸)씨 가족이다. 이씨의 가족은 첫째인 이씨를 포함해 이효영(사회생활·72년졸), 이주영(영문·75년졸), 이은영(관현·78년졸), 이혜영(피아노·83년졸), 이혜림(독문·86년졸), 이선영(신방·89년졸)씨가 모두 본교를 졸업했다. 본지는 첫째 이씨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일곱 자매가 선택한 이화
부모님이 두 분 다 좋은 학교를 졸업하셔서 그런지 교육열이 높으셨어요. 딸만 일곱이라 집안에서 남녀 차별을 받은 적이 없었고, 아버지께서는 일찍부터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고려해 딸들이 삶을 개척하면서 살기를 바라셨어요. 지금도 물론 이화는 좋은 학교이지만 1966년 제가 이화에 입학할 당시 우리 학교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여대였고, 서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여대여서 부모님께서 이화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셨죠. 특히 주영이(셋째)는 경기여고 시절 전교 1, 2등을 하던 학생이어서 고등학교에서는 서울대를 가라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여자는 이대에 입학해 소양을 쌓고 품위를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일곱 자매가 모두 이화에 오게 됐어요. 

-일곱 자매의 이화 생활
첫째인 저와 선영(일곱째)이는 19살 차이가 나서 학교를 같이 다니지 못했어요. 워낙 자매가 많아 한 명이 학교를 졸업하면 한 명이 입학해 항상 세 명 정도가 교대로 같이 학교에 다닌 것 같아요. 저와 효영(둘째)이는 2년 차이가 나 같이 학교에 다녔지만, 과가 달라서 학교에서 자주 마주치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이화가 강조하는 ‘봉사하는 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겨 일곱 자매가 지금까지도 같이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어요.

-나와 동생의 연결고리 이화
제가 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이화를 추천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행동으로 동생들이 이를 본받게 하고자 하는 신념은 있었죠. 또 지금 생각해보면 부담이었을 수도 있지만, 부모님께서 첫째인 저에게 “네가 잘해야 동생들이 본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해오셨어요. 그래서인지 제가 걸어온 길을 동생들이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 것 같아요.

-또 하나의 가족 이화
당시는 옛날이라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바로 결혼을 하셔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대학에 다니지 않은 것이 미련이 남아 우리 자매를 다 키우시고 이영회(이화여성고위경영자과정)를 수료하셔서 어머니도 이화 동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또, 제가 학교에 다닐 당시 총장이셨던 김옥길 선생님과의 특별한 인연이 기억에 남아요. 김옥길 선생님은 당시 그 많은 학생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해주셨어요. 학교 다닐 때 개인적으로 김옥길 선생님을 찾아뵌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나중에 결혼하고 20년 후쯤 문경에 갔을 때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는데, 그때까지 저를 기억해주시고 제 남편에게 ‘이화의 사위’라고 부르셨죠. 그래서 이화에 항상 가족의 포근함을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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