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명의 기도로 이뤄진 한국기독교, 그 속에서 찾는 이화의 초석(礎石)
145명의 기도로 이뤄진 한국기독교, 그 속에서 찾는 이화의 초석(礎石)
  • 김송이 기자
  • 승인 201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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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화진 성지공원 전경 김지현 기자=wlguswlgus32@ewhain.net
▲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전경 
▲ 양화진 홀 입구에 설치된 조선을 향한 예수의 마음을 담은 문구 
▲ <로제타 홀의 일기>공개특별전에 전시된 로제타 홀이 받은 편지 

  스승의 날과 창립 130주년이 함께 있는 5월의 첫 주를 맞아 본지는 27일 이화의 스승을 만날 수 있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을 찾았다. 본교는 매년 스승의 사랑과 헌신을 기리는 ‘이화 스승 추모예배’를 스승의 날 전후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서 진행하고 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는 이화학당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튼(Mary Fletcher Scranton) 초대 총장, 조세핀 페인(Josephine O. Paine) 제3대 총장, 앨리스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제6대 총장 등 이화의 주춧돌을 놓는 일에 헌신했던 스승들이 안장됐다.
 

  양화진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지역의 한강 북안에 있던 나루터의 지명이다. ‘버들꽃 나무’라는 의미를 가진 양화진은 경관이 빼어나 당시 뱃놀이 명소였으며, 숱한 시인들이 풍류를 즐겼던 장소다. 동시에 초기 천주교도들이 순교한 곳이며, 상해에서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신이 청나라와 정부에 의해 능지처참당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재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 선교사와 그 가족 145명이 안장된 장소다.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와 한강공원 쪽으로 향한 골목길을 3분 정도 걷다 보면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문에 들어서면 분홍색, 빨간색 등 알록달록 꽃으로 둘러싸인 묘원이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른쪽으로는 양화진 봉사관이, 왼쪽에는 묘원과 이어져 있는 양화진홀을 만날 수 있다. 양화진홀은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가 양화진에 안장된 선교사들의 사랑과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공간이다.
 

  양화진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 선교사들을 보내주셨다’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이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구절을 변형한 것으로 전시의 주제이기도 하다. 변형된 이 구절은 조선인들은 신이 선택한 아들과 딸이기 때문에 신이 선교사들을 조선에 내려보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전시장 입구는 최소한의 조명만 설치돼 전반적으로 어두운 느낌을 줘 마치 영화관에 온 것 같다. 이는 선교사들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당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대 상황을 조명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른쪽으로 발길을 돌려 복도로 진입하면 바다 위를 걷는 느낌을 받는다. 물결치는 영상이 바닥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약 130년 전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올 때 2~3달 내내 배를 타고 왔던 공간적, 심리적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영상이 비추고 있는 복도의 양옆 벽면에는 묘원에 안장된 145명 선교사의 영문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본교의 전신(前身)인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튼 총장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
 

  바다 위를 걸어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서면 고서(古書)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왼편에서 제일 먼저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 책은 1882년 만주에서 처음으로 한글로 출간된 누가복음으로 누렇게 바랜 색을 통해 오래된 고서(古書)임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당시 조선이 맺은 강대국과의 불평등한 수교는 우리 민족에 달갑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복음이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왔던 19세기 당시에는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선교가 이뤄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만주에서 활동하던 로스 선교사가 1874년 봉천현 심양에서 조선인들을 만나면서 이들과 협력해 성경의 한글 번역에 착수했고, 1882년 전시장에 전시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완성됐다.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옆으로는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의 일기가 전시돼 있다. 로제타 홀은 1890년부터 1933년까지 43년 동안 한국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했다. 홀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인 보구여관을 비롯한 여러 여성 병원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본교 출신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양의(洋醫) 박에스더를 길러냈다. 전시된 4권의 일기에는 그녀가 고향 집을 떠나는 날부터 남편 윌리엄 홀(William Hall)이 순직할 때까지의 상황이 기록돼 있다. 그녀의 일기를 살펴보면 조선을 향한 남다른 애정, 조선에 오기까지의 여정, 한국에서 펼친 선교활동 등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조선과 조선인, 그리고 내일을 사랑한다. 홀 박사가 조선에 오게 된 것은 더없는 축복이다. … 그를 이곳에 오게 한 일은 조선 선교를 위해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1891년 10월27일 로제타 홀씨의 일기에서)
 

  발걸음을 뒤로 돌리면, 로제타 홀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의 왕진 가방, 청진기, 혈압 측정기 등이 전시장 중앙에서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셔우드 홀은 그의 부인 매리언(Marian)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전문 요양병원을 설립했다. 또한, 결핵 퇴치 모금을 위한 조선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도 만들었는데, 이 또한 그의 유품과 함께 놓여있다. 이 실은 숭례문의 모습을 그렸는데 원래는 거북선의 모습을 담으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변경됐다고 한다.
 

  해주지역 신도들이 안식년을 맞은 셔우드 홀에게 준 비단편지, 로제타 홀의 기행편지 등을 지나면 마지막으로 영상을 볼 수 있는 코너가 마련돼 있다. ‘한글, 성경은 만나다’라는 제목의 영상은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가 조직됐을 때부터 첫 한글 성경 「셩경젼셔」가 출간될 때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코너 중간에 놓인 책에 손을 올리면 영상이 시작되고, 약 8분간의 영상이 끝나면 전시 관람을 마치게 된다. 
 

  양화진홀을 나와 옆으로 발걸음을 돌려 선교기념관을 지나면 145명의 선교사와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 4번 입구에 들어서게 된다. 푸른 수목들과 비석들이 어우러진 묘역은 마치 외국 묘지로 착각할 만하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무덤인 만큼 십자가 모양의 비석과 영어 글귀가 곳곳에서 눈에 띄기 때문인데, 이러한 묘역의 풍경은 방문객에게 입장과 동시에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묘역은 A~I까지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스크랜튼 총장과 아펜젤러 총장의 묘역은 B 구역에 있다. 스크랜튼 총장 묘역 앞에는 본교 재단에서 세운 ‘이화의 창설과 초석을 놓으신 스승들’이라는 제목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건너편 C 구역에는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Appenzeller H.G.)의 묘석이, 뒤편의 F 구역에는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Underwood H.G)의 묘석이 있다.
 

  묘역 4번 출입문으로 나와 앞으로 가면 양화진 성지공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공원은 나무들과 벤치 등 자연경관과 역사적 자취를 느끼며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확립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새겨 볼 수 있는 한적한 장소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을 찾은 이상민(25··서울 동대문구)씨는 “전시를 통해 한국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며 “그 과정에서 많은 선교사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 교회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