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각장애 1급을 딛고 임용고시에 합격한 김태연씨. 이명진 기자 myungjinlee@ewhain.net

  "‘내 안의 힘’을 기르세요. 그럼 바깥 상황이 어떻든 자신의 강인함으로 극복해낼 수 있어요. 목표를 세우고, 긍정적인 기운을 내 안에 채우는 거예요.”

  2월26일 서울시 관악구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의 1층 카페에서 김태연(영교·16졸)씨를 만났다. 특유의 밝은 웃음과 분위기가 주위를 밝히듯 따뜻하게 번졌다. 김씨는 2009년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은 이후 이곳 복지관의 지원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2월에 졸업한 김씨는 이번 달부터 서울시 구로구 경인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다. 43세의 나이와 시각장애 1급. 2012년 본교에 입학하고 올해 졸업해 교사가 되기까지 김씨가 넘어야 했던 산은 매우 높았다. 인생의 굴곡에 당면할 때마다 김씨는 ‘내 안의 힘’을 발휘해 극복해냈다. 목표를 세워 이루고야 마는 추진력, 악조건조차 극복해내는 밝은 에너지가 김씨 내면에 숨은 힘이었다. 

  시력은 어릴 적부터 안 좋았다. 두꺼운 안경과 렌즈를 끼는 정도였던 것이 대학 입학을 한 달 앞두고 급격히 악화됐다. 어느 날 바깥에서 햇빛을 마주 보는 순간 눈에서 ‘팍’하는 충격과 함께 오른쪽 눈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 날 이후 앞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됐다. 건국대 수의학과에서 수의사를 꿈꾸던 스무 살의 김씨는 1년 만에 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당시 의료기술로는 김씨의 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의사를 찾아 독일까지 다녀왔으나 성과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삶을 뒤흔든 이 병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은 심정이 절박했다. 훗날 김씨는 자신의 병이 ‘황반변성’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황반변성은 물체의 상이 맺히는 망막 중심부인 황반에 변성이 일어나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병이다. 일 년 뒤에 왼쪽 눈에도 증상이 나타났고, 33살에는 백내장을 앓게 됐다. 물에 반사된 빛조차 눈이 부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루에 외출이 가능한 시간은 단 10분.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지기 전이었다. 밖에 나갈 수가 없으니 4년은 거의 집안에서만 지냈다. 그는 백내장 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집 안에서만 지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말하자면 방황이었어요. 방황이 길어지자 점차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기나긴 칩거 생활 중 36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복지관을 찾았다. 장애를 가지고 나서 15년 만의 일이다. 복지관에서 컴퓨터와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점자 경시대회에서도 입상했다. 마침내 장애를 딛고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성취감이 생겼다.

  성취감은 대학에서 다시금 공부를 해보겠다는 의지로 자라났다. 본교에서 영어교육학을 공부해 교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굳혔다. 영어 교사의 꿈은 지난 날 김씨가 학습지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에서 비롯됐다. 대학교 중퇴 후 라디오를 들으며 영어 공부를 시작했던 김씨는 동네 이웃을 따라 영어 학습지 교사 일을 4년간 했다. 사람 좋아하고 사회성 좋은 김씨에게 우연히 시작한 교사직은 천직이었다. 좋은 교사로 학부모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 지도학생 수가 늘어갔다. 김씨는 아이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단에 서면 마치 무대에 선 느낌이 드는 거에요. 아이들을 가르칠 때 힘이 솟아요. 내게서 가장 좋은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죠.”

  그 꿈을 믿고 38살 가을부터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컴퓨터 음성을 들으며 청각에 의존해 책을 읽고 문제를 풀었다. 2011년 수능을 치고 본교 영어교육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김씨가 39살 된 때다.

  “이화에서 공부한 데에는 장애학생지원센터의 도움이 컸어요. 마치 부모님의 맹목적인 지원 같달까. 내가 내 공부하는 건데 그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니까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매번 했죠.”

  김씨는 모든 수업자료를 귀로 들으며 공부했다. 강의 녹취록을 작성한 뒤 글자를 음성으로 변환해 수도 없이 반복해 들었다. 장애학생지원센터의 학습도우미들이 수업시간마다 도왔다. 음성 프로그램이 변환하지 못하는 그림과 표, 기호를 일일이 옮겨 김씨에게 전달해줬다. 교수들은 수업시간에 시각장애인인 김씨를 배려했다. 강의 중에 대명사를 사용하는 법이 없었다. 김씨가 ‘이것’, ‘저것’이 지시하는 대상을 알아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어렵게 다시 시작한 공부잖아요. ‘늦은 나이니만큼, 공부 한번 실컷 해보자’는 생각으로 공부에만 전념했어요. 학기 중에 학교 밖 친구를 만나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결과 첫 학기에 4.05학점을 받았다. 높은 학점이 목표가 되자 더욱 공부에 매진했고 심리학에도 관심이 생겨 복수전공을 했다. 심리학은 학생의 마음, 학부모의 마음을 듣고 가르치는 이의 자세를 다지는 데까지 연결됐다. 김씨는 3.97학점으로 졸업했다. 

  4학년부터 임용 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해 최종 합격 소식을 들었다. 김씨는 경인중학교 영어교사로 발령됐다.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일반 학교에서 교사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주위의 걱정 어린 시선이 많았다. 김씨는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고 잘한다면 장애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이 교사직을 잘할 수 있을지는 장애의 유무보다는 그 사람의 성향이 결정하는 바가 크다고 봐요. 결국 사람을 대하고, 관계를 쌓는 일이니까요. 여전히 긴장되고 걱정스러워요. 그래도 전 가르치는 일을 잘해내고 대인관계에서 적극적이니만큼 일반 학교에서도 잘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시각장애 3급에 이은 1급 판정으로 38살의 나이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교사가 되기까지. 인생의 굴곡에서 김씨는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는 힘을 길러내게 됐다. 김씨는 삶에서 오는 좌절로 무너진 이에게 “목표를 갖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목표를 이루려 노력하고 긍정적인 기운을 쌓으며 내면의 강인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훗날 힘들 때가 온다면 나를 떠올리면 좋겠어요. ‘그때 나를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던 선생님도 어려운 조건에서 극복해냈으니까 나도 할 수 있어’라고요. 긍정의 에너지와 스스로 극복하는 힘을 기르는 방법을 내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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