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 인문학, 그 경계 허물기

 흔히들 의과대학은 이공계라고 생각하지만 의과대학에서도 인문학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 의과대학에서도 의학교육학교실, 의료인문학교실, 인문의학교실, 인문사회의학교실, 의사학과 등의 이름으로 의학교육학, 의료윤리학, 의료인류학, 의학사, 의철학 등 의학과 관련이 된 인문학 분야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곳들이 점차 생겨나고 있다. 이는 사실 당연하다. 의학은 인간 또는 인간 집단을 대상으로 질병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인간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목표로 하는 인문학적인 성격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날로 폭증하는 의학지식과 기술을 제한된 시간 안에서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가를 고민하다보니 교육학에 손을 내밀게 되었고, 시험관 아기나 연명의료, 장기이식 등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의료윤리 문제들이 생겨나면서 의료윤리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즉, 의과대학에서 인문학은 그 학문적 가치뿐 아니라 당장 의술의 실천에 적용해야 하는 실용성으로 인해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료인문학은 의과학 지식과 더불어 인문학적 소양도 함께 쌓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학제간의 벽이 높은 대학 환경에서는 제대로 발전하기 어려웠다. 여전히 많은 의대 교수들에게 윤리학이나 철학, 역사학은 '교양' 수준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인문학을 전공한 교수들에게 의대는 도무지 접근이 어려운 낯선 곳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간, 질병, 치료, 죽음이라는 주제는 의학과 인문학의 공통 관심사이고 학문간 통섭, 학제간 연구, 융복합이 화두가 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상호 대화를 통해 가장 생산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즉, 유전자 조작, 안락사, 인간 능력의 증강 등 첨단 의학과 관련된 주제들은 인간과 사회,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인문학에 촉구하며, 또 의료 현장에서 매일 매일 발생하는 사태들에 대한 인문학의 통찰은 의학에 실질적인 기여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의학과 인문학의 대화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며, '인문학의 위기'가 운위되고 있는 오늘날 인문학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대화가 생산적이 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선진국의 학문이나 이론은 일부분 도움이 되겠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베껴서 응용하기가 아닌, 그 학문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윤리학의 경우라면 우리는 무엇을, 왜, 어떤 관점에서 윤리적 쟁점이라고 생각하며, 그 해결은 어떤 전제나 원칙에 의거하고 있는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이화여대 생명의료법연구소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의학과 법학, 철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교수님들이 함께 참여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한 학술적, 실천적 활동을 해 왔다. 또 '생명윤리정책협동과정'을 통해 우리나라 생명윤리학을 이끌어가고 있는 신진 연구자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하여 왔다. 최근에는 기관윤리위원회 간사, 임상시험 모니터요원(CRA), 생명의료윤리 교육전문가 등 이러한 지식을 요구하는 새로운 직군들이 생겨나고 있는 만큼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의 사회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다.

 올해의 메르스 유행 사태는 역병과 사회, 문화, 법률과 제도에 대해 수많은 미해결의 문제들을 던져주었고, 그 상당 부분은 단지 의과학만으로 풀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역에 뛰어들어 창조적으로 미래를 개척할 젊은 인문학자와 사회학자들을 의과대학, 그리고 생명윤리정책 협동과정은 기꺼이 환영하고 또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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