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있는 '소수'가 있기에 '다수'의 균형이 유지된다

 ‘식물의 성장은 가장 부족한 필수영양소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제아무리 좋은 환경에 다른 영양소가 풍부하더라도 어떤 영양소가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식물의 생육과 성장에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더 리얼한 예를 들자면, 커피 두 스푼에 설탕 열 스푼이 있다. 그런데 한 잔에 커피 두 스푼, 설탕 한 스푼을 넣는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커피는 몇 잔이 될까? 답은 간단하다. 아무리 설탕이 많아도 그가 마실 수 있는 커피는 한 잔이다.) 1843년 독일의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가 주창한 이 이론은 리비히의 법칙, 또는 최소량의 법칙이라 불린다. 파리 유학에서 돌아와 기센대학의 교수가 된 그가 1826년 실험실을 열었을 때만 해도, 독일에서 화학은 아직 독자적인 학문 영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실험실은 근대 화학교육의 산실로 과학강국 독일의 단초가 되었다.

 애초 방해받지 않고 농사지을 땅을 갖는 것이 유일한 욕심이었던 소작농 바흠은 일생일대의 희소식을 접했다. 걸어서 도달한 만큼의 땅을 값싸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앞으로 앞으로 걸어갈수록 점점 더 비옥하고 탐스러운 땅이 눈앞에 펼쳐졌다. 땅부자의 꿈이 성취될 순간을 코앞에 두고 숨이 붙어있는 한 최대한 멀리, 최대한 빨리 걸은 덕분에 그는 약속대로 해가 지기 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무리한 행보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결국 그에게 온전히 돌아간 것은, 목숨 바쳐 얻고자 했던 광활한 대지가 아닌 한 평 땅에 불과했다. 레프 톨스토이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고.

 리비히와 톨스토이. 일견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두 사람은 특이하게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다름 아닌 모든 다른 조건들을 의미 있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에 대해 묻고 있다. 공교롭게도 19세기에 나란히 제기된 이 물음은 비단 그 시대에만 한시적으로 유효했던 생각이 아니며, 과학과 문학이라는 한정된 영역에만 해당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때 자기 분야에서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했던 걸출한 이들이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에 종종 접하게 된다. 그 업적을 이루기 위해 평생 쏟아 부었을 노고를 생각하면 역지사지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 사람의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들은 상당히 복합적이어서 어느 하나로 명쾌하게 규정짓기가 쉽지 않다. 반면 극적인 실패의 이유는 대체로 결정적인 하나로 모아진다. 이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의 대단원은 그에게 가장 결여된 어떤 요인, 즉 최소량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오차 없는 자연과학적 인생의 법칙이다.

 최소량의 법칙은 비단 개인의 인생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유기체의 특성을 지닌 모든 존재 형태를 훌륭히 설명해준다. 물론 이 견해에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각자 판단할 몫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의미 있는 ‘소수’가 존재함으로써 전체 또는 ‘다수’가 건강하게, 균형 있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 법칙은 어떤 이들에게는 불필요해 보일지도 모르는 특정 학문분야나 예술영역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줄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나아가 이 지구가 건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량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게 한다. 리비히 혹은 톨스토이에 따르면 이러한 소수는 - 쉽게 빠지는 생각의 오류처럼 - 우리가 배려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의 건강한 성장을 담보하는 필수요건이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출발점의 기준에서 볼 때 서로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지만, 목표 지점의 기준에서는 하나의 언어이다. 단지 각자의 관점에서 창의적인 해석과 번역을 요구할 뿐이다. 이 작은 노력이야말로 융합적 사고의 첫 걸음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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