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 교정에서 진짜 나를 만나다

  인생의 선배로, 여러분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나는 이화의 학생을 상대로 이 말은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다. 나 스스로 이화를 마음껏 누렸던 젊은 날의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 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도 젊은 날 이화에서 보내는 시간을 마음껏 누렸으면 좋겠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 이화는 단순히 학교가 아니라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 준 특별한 곳이었다. 젊은 날의 분노를 사랑으로 가라앉혀 준 곳이 바로 이화의 교정이었다.

  35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이화의 신입생으로 입학했을 무렵 나는 속으로 분노를 가득 안고 있었다. 2년 전에 갑자기(?) 목사 안수를 받으신 아버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제천 의림지 근처 조그만 단칸방에서 교회를 개척하신다고 떠나셨다. 당연히 생활은 온통 망가져버린 상태로 느껴졌다. 사실 아버지의 목사 안수는 갑자기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신학교 편입과 졸업에 더하여 신학대학원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었다. 그래도 당시 나에게는 그 일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든 난관으로 느껴졌다.

  그 일을 핑계로 나는 모든 일에 날카롭고 뾰족한 반응을 드러내면서 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큰 소리를 내면서 싸우는 일에 익숙하지 않으니 나서서 시비를 거는 용기는 없었지만 조용히 눈을 내리깐 채 온통 날카롭게 마음의 칼을 갈고 있다가 누가 나를 건드리기만 하면 서늘한 폭발음을 쏟아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무능함을 비난하지 않은 채 오히려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 인정하는 어머니의 '이상한' 논리에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린 상태로 주변의 상황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기독교와 세계 시간에 들어갔는데 그 과목을 담당하셨던 한준석 교목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셨다. “김석향? 이름이 예쁘구나. 누가 이름을 지어 주셨니?” 나는 아마도 우물쭈물 대답을 웅얼거렸던 것 같다. 한 번도 만나 뵙지 못한 할아버지가 막내아들인 내 아버지 혼자 피난길에 나서라고 등을 떠밀어 보내실 때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 하는 성경말씀을 알려주시며 혹시라도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거든 반드시 돌 석(石)을 넣어 이름을 지으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부터 태중에서 온갖 유형의 발차기를 하는 통에 아들인가 생각했던 부모님이 막상 여자아기가 나오니 돌 석자를 넣어 이름을 지으려고 한 달 내내 옥편의 모든 글자를 동원해서 이름을 만들어 보시다가 향기 향(香)을 넣어 석향(石香)으로 결정하셨다는 내용까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돌이켜 봐도 왜 그렇게 길게 대답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한준석 선생님은 계속 중얼거리던 내 대답을 막지도 않으시고 가만히 듣고 계셨다. 그렇게 듣고 계시다가 수업 끝나고 연구실로 찾아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대강당 2층에 있던 연구실로 들어설 때 햇살이 환하게 선생님의 등 뒤를 비추었다. 기억 속 연구실은 굉장히 넓고 환했다. 나중에 이화에서 근무하게 되었을 때 예전 선생님의 연구실 자리를 찾아 갔다가 그 장소가 넓지도 않고 환하지도 않아서 놀랐다.

  어쨌거나 그 당시 연구실에 들어서는 나를 보시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대체로 칼을 품어도 솜으로 겉을 싸는데 너는 오히려 칼 속에 솜을 품고 있구나. 네 속에 있는 솜을 조금 더 드러내도 괜찮다.”

  큰 소리로 울지는 않았지만 그 때 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누군가 내 서러움을 알아주는 것이 고맙다는 느낌에 목이 잠겨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면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용기를 조금씩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내가 그랬듯이 여러분도 삶이 어렵고 힘겨울 때, 서러운 느낌으로 가득할 때 주변을 돌아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선생님을 이화의 교정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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