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에 일상의 느낌들을 담아 나만의 '토지'를 만들자"

  갑자기 찾아온 병마 때문에 평생 한번 있는 새내기의 생활을 뒤로 미뤄둔 동생이 있다. 어느 날 수술을 기다리며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동생은 암울하게 앉아있는 나에게 “대학입학 자기소개서에 쓸 얘기가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이번 일 덕에 세 장은 거뜬히 채우겠네!”라며 자조했다. 그와중에 자기소개서를 떠올리는 동생에 어이없어하며 나는 “그래 좋겠다. 나도 좀 베껴 써도 되냐”고 되받아쳤다. 취업을 위해 ‘보여주기식 인생’을 살기위한 한국 사회 청년들의 웃(기면서 슬)픈 현실이다.

  우스겟소리는 장난을 넘어 현실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었다. 발등에 불붙은 취업준비생들이 기업 입맛에 맞춰 자기소개서를 거짓으로 쓴 것이다. 한 취업포털사이트에서 구직자 573명을 대상으로 '취업 스토리를 과장할 의향'을 조사한 결과, 36.6%가 ‘취업을 위해서라면 스토리를 과장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실제로 응답자의 24.6%는 이미 구직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스토리를 과장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원자의 이야기를 통해 잠재력과 인성을 파악하고자한 스토리 전형의 취지가 무색한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흔히 거론되는 취업난이 아닌 지원자들의 몰이해 때문이다. 인사 관계자는 지원자들이 영화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을 대하는 자세, 작은 에피소드에서 느껴지는 그 사람만의 시각 등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한 많은 대학생, 구직자들은 자신의 평범한 인생이 경쟁력이 없다며 과소평가한다. 기승전결의 굴곡이 가파른 시나리오가 먹힐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우리 눈에는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사, 아무 탈 없이 거쳐 온 학업 등은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 취업 시장에서 눈길을 끌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마치 하나의 기업과 직업을 바라보고 역경을 헤쳐온 양 자기소개서를 꾸미게 되는 이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의하면 서사전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플롯’이다. 시학에 의하면 서사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필연적 인과관계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나열될 때 가장 훌륭한 스토리가 나오게 되며 연민, 슬픔과 같은 감정(파토스)를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상업영화나 드라마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형식이다.

  한편, 현대문학의 금자탑이라 불리는 박경리의 '토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주장하는 ‘올바른 서사전개 방식’을 벗어나 독자적인 형식을 갖춘 것으로 높게 평가받는다. 500명이 넘는 토지의 등장인물들은 계급도 다르고 저마다 가치관도 다르다. 각 인물들의 이야기가 모두 하나의 사건에 관계하는 것도 아니다.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와 한 가정의 가장 사이에서 고민하는 김길상, 양반 남편에게 멸시와 구박을 받으면서 아들 둘을 바르게 키우고자 아등바등 살아간 중인 출신 함안댁 등 저마다의 삶은 소박하면서도 또 다 다르다. 

  우리가 지금까지 겪은 인생은 '일리아스', '오딧세이아'보다는 '토지'와 같다. 기대수명의 절반도 채 살지 않은 우리에게 삶의 굴곡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가파르겠는가. 그저 평범하게 살아온 하루하루가 모여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자기소개서를 화려하게 쓰지 못할지언정 지금까지 살아온 소중한 날들을 기만하지는 말자. 일상에서 느낀 작은 느낌을 담아 나만의 토지 같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스토리다. 아리스토텔레스식 스토리만이 살아남으라는 법은 없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