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 000호

  2년 전, 이화 교정에서 졸업 사진을 찍으며 나는 레디메이드 000호가 되었다. 검은색과 흰색의 소위 '유관순' 옷을 입은 나는 몇 개월 후 같은 옷을 입고 사회에 나를 팔기 위한 홍보 활동을 시작했다. 스펙 초월 채용을 강조하는 사회는 레디메이드란 단어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나 실상은 비슷하다. 차별적인 경험을 요구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어느 위치에 둬도 이상하지 않을 가장 보통의 사람을 가려내는 과정이었다. 경쟁선에 있는 사람들은 보통의 학교에서 보통의 활동을 해왔으며, 따라서 사회에서 누락되지 않을 수 있는 기성제품(기성직원)이 될 수 있다고 자신을 판매했다. 기업 내 보통 혹은 그 이상의 직원 기준인 다수의 인적성과 면접을 통해 필터를 거쳐 내가 있어야 할 사회적 진열대에 오르기 위해 그렇게 나는 레디메이드 000호가 되었다. 2014년 여름, 나는 기준심사를 통과했고 사회생활이란 걸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하는 남성여성

  본교를 거쳐간 사람들이라면 예민하게 반응할 법한 말 '여대 출신'. 앞서 기성직원이 되기에 적합할 요소를 모두 장착했다고 여겼던 나는, 여대 출신이란 해시태그를 지우고자 스스로 노력했다. 그 결과, 몇 개월 후 직장에서 나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추진력, 체력, 승부욕, 어깨 등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남자 동기들과 비교하며 이게 어떻게 여자 사원의 해시태그냐며 놀렸다.

  사회 생활을 할 때 남자답고, 여자다운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도 나는 모른다. 분명 섬세하고 꼼꼼한 남자 임원도 있으며, 공격적이고 리더십이 강한 여자 임원도 있다. 가뭄에 콩 나듯 있는 여자 임원에 대해 남자 부하직원들은 인격적이고 다소 성적인 모독도 종종 한다. 그들에게는 그냥 담배 한 대 피우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일에 열정을 바친 나, 너, 우리 여자들의 종착지가 그처럼 될까봐 마음을 쉬이 붙이지 못했다.

#내부 고발자의 어려움

  한 때 사내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피해를 당한 여직원보다 오히려 남직원들이 강렬히 분개하며 고소를 진행하자고 했다. 다년간 여성학을 학습한 결과로 그렇게 주저함 없이 신고를 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감추고 싶었던 이화여대 출신이었기에 오히려 가능한 일이었다. 가해자는 사실 상습범이었는데, 피해만 있고 피해자는 접수 되지 않아 처벌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룹사 이미지 실추를 가장 걱정했던 임원진은, 피해자의 입을 단도리 하는 조건으로 신입사원이 팀장을 해임하는 특급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사건을 급히 마무리 했다. 어려운 일을 겪으며 큰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건 늘 속이 뒤틀리게 짜증나면서도 차라리 감사한 아이러니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으며, 사회 생활에 대한 배신과 감동이 뒤범벅된 채 일년이 흘렀다.

#그렇게 보통의 어른이 된다.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던 직장 동료, 선배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기도 하고, 또 새로운 사람이 와서 그 빈자리를 채우기도 한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파트너가 되기도 하는 과정에서 언젠가부터 웃는 얼굴인지 우는 얼굴인지 구분되지 않는 가면을 체득해 나간다. 협력업체와 내부 직원들과 지지고 볶으면서 나름 win-win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요즘, 나는 대한민국에서 보통의 어른이 되기 위해 또 다시 산통을 겪고 있다.

  늘 익숙한 과정이지만, 가장 보통의 생활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노력할 것이 많다. 삶에서 보통이라는 등급, 화려한 A도 아닌 가장 무난해서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B라는 성적을 얻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크게 바라는 것도 아닌데, 무소유의 정신이어야 미친 전세와 치솟는 물가를 의연히 감당할 수 있는 도시인이 될 수 있나 보다. 내가 사는 지금 이 집에서 내년에도 살고 싶으면 현재 상태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한다. 그렇게 나는 괜찮은 딸이고 싶고, 아내이고 싶고, 엄마이고 싶은 보통의 소망을 놓치고 싶지 않아 오늘도 만원 지하철 출근길에 몸을 싣고 일터에서 8시간 이상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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