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계는 그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는것"

  2주 전이었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대화의 마지막을 지키다가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친구와 통화를 하며 걸어왔던 탓일까. 매일 지나치던 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던 계단을 보지 못해 넘어지고 말았다. 그날 새벽 나는 계속되는 다리 통증에 응급실에 가게 되었고 결국 인대가 파열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내 발은 석고와 녹색 붕대로 칭칭 감겼고 정상적으로 걷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날부터였다. 내 세상은 이전과 다르게 바뀌었다. 아니, 세상은 그대로였다. 다만 내 시선과 내 처지가 달라졌을 뿐. 통학 길을 걷는 내 발에 납덩이가 묶여 있는 것처럼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다. 다리를 움직일수록 회복 속도가 더뎌진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교에 가야 했다. 다리를 쭉 펴고 집안에서 누워만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 선택에 비례하게 내가 희생해야 하는 것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았으리라. 그래서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참는 것이었다. 아픈 것도 참고, 실망하는 것도 참고. 어쩔 수 없이 만원 지하철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지하철에서 서있는 것조차 힘든 이른 아침 시간대였다. 솔직히 내가 보상심리를 가지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여태껏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며 임산부와 어린 아이,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당연히 나에게도 누군가가 자리를 양보할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노약자와 장애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가르침은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워왔으니까.

  하지만 그날 현실은 내 기대와 아주 반대였다. 지하철에서 서 있는 동안 내 시간은 아주 느리게 갔다.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현실에 실망하려는 순간 나는 옆에서 숨찬 소리를 내며 서있는 만삭의 임산부를 보았다. 남산 만하게 나온 배를 힘겹게 쓸어내리며 견디는 임산부를 보며 나는 잠시라도 양보를 “기대”하였던 것에 실망감을 느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 받는 일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일이라는 것을. 어쩌면 나는 나 자신만의 시각과 관점으로만 이 세계를 정의내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뿐만이 아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떼었을 계단.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경사져 있는 언덕.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보지 못하던 세계의 단면이었다. 멀쩡한 다리로 걸었을 때는 일상이었던 내 학교가, 이 세계가, 다리를 다친 나에겐 한없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세계 자체가 변해버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었던 것이다. 약자에게는 한없이 잔인하며 이 잔인함이 당연시하게 묵인되는 세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천국과 지옥 사이의 끝없는 길이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나에게 그 길이 사이에 존재하는 저마다 다른 처지의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유명 미국 드라마 <뉴스룸>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계는 바로 그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 문제를 인식하는 것부터가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들은 우리가 쉽게 발견할 수 없도록 틈새 깊숙이 숨겨져 있으니까. 만약 내가 그날 밤, 다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턱이 이렇게나 불편한지 몰랐을 것이다. 지하철 역사 내부에 에스컬레이터가 없다는 사실을, 전동차 내부에 있는 임산부석이 실제로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이전의 나로서는 절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주부터 대중교통을 타면 나도 모르게 노약자석에 앉기 시작했다. 거리낌 없이 노약자석에 앉는 나의 모습이 현실과 타협한 결과라면 나는 조금 서글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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