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사 저작권팀

  이화에서 마지막 학기를 끝내고 맞이한 여름 방학 동안 대관령에서 인턴십 프로그램을 다녀왔다. 한 달 동안의 인턴 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니 나에겐 취업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슬슬 자리잡기 시작했다. 방송영상학을 전공했지만, 방송계 쪽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진작에 깨달은 터라 어느 쪽으로, 어떤 분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조차 무척 막막하게 느껴졌다. 동네 카페에서 끊임없이 자기소개서를 고치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던 중, 한 출판사 저작권팀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책이라면 가리지 않고 무조건 읽어왔다. 화장실에서도, 밥을 먹을 때도 늘 자리에 앉기 전에 책을 한 권씩 집어와야 마음이 편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상황일수록 책에 대한 갈망은 더 심해졌던 것 같다. 고3 시절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엄마에게 카드를 받아 들고 서점에 가서 책을 10만 원 어치씩 잔뜩 사서 짊어지고 오기도 했고(다른 때에는 짠순이인 엄마였지만 유독 책 사는 데에는 관대하셨다), 시험이라도 봤던 날이면 밤새워 책만 읽기도 했다. 이렇게 책에 빠져있던 나에게 출판사라니. 공고를 본 순간 나는 내가 어떤 쪽으로 나가야 할지 대략적으로라도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여느 취업과정처럼 자기소개서를 쓰고, 2번의 면접을 본 뒤 출판사의 저작권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보통 출판사에서 일한다고 하면 편집자를 많이 떠올린다. 편집자는 작가가 쓴 원고 혹은 역자가 번역한 외서의 원고를 읽고 다듬어 한 권의 책을 완성해내는 반면, 저작권 담당자는 외서를 수입하거나 국내서를 수출하는 과정에서 다리 역할을 한다. 외국 출판사나 에이전시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외서를 소개하고 검토한다. 검토 결과가 좋을 경우, 수출·입을 위한 계약 절차와 이후 책 출간을 위한 각종 컨펌 절차 등의 일을 한다.

  처음엔 출판 관련 생소한 단어들이 가득한 영어로 된 계약서를 보고 있자니 내가 이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을까 싶은 의문도 들었다. 나름 영어에 자신이 있던 나였지만, 계약서를 읽으려면 네이버 영어사전을 항상 켜놓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처음 제대로 해보는 사회생활이었기에 작게는 내 말투나 복장부터 크게는 회사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몇 개월 동안 내가 느끼는 피로감은 극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환경이다. 사무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책이 가득하고, 내 양 옆으로 책이 잔뜩 쌓여 있다. 외국에서 검토해보라고 보내주는 각종 신기한 책들을 펼쳐볼 때마다 내 얼굴에는 웃음이 피어오른다. 때로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남겨둬야지, 직업으로 삼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내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책이 가득한 환경에서 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무실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자면 참 오묘하면서도 뿌듯하다. 내가 한때 열렬히 좋아했던 작가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또는 요새는 그 작가의 위치가 어떤 수준인지 알 수 있다는 점도 무척 흥미롭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매일 고민하던 '나는 뭐 해먹고 살지?'에 대한 대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책장이 빽빽하도록 책이 가득 꽂혀있던 회의실에서 처음 1차 면접을 보던 날 팀장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지 물으셨었는데,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사실 이전까지는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할지 몰랐었는데 여기 들어오니까 알겠습니다. 설사 지금 이곳에서 면접을 보고 떨어지더라도 저는 꼭 책이 가득한 환경에서 일할 것입니다.” 꽤 당돌한 발언일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 팀장님께서는 책에 대한 나의 열정을 좋게 봐주셨었다. 가끔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혼자 깊은 한숨을 푹푹 내쉴 정도로 처음 해보는 사회생활이 마냥 어렵게만 느껴지지만, 아침마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에 둘러 쌓여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