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자식은 담론적인 관계

  곧 어버이날이다. 원래 어머니날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럴 수는 없다는 듯이 아버지도 한자리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관계는 질적으로 다르다. 아이를 가지면 어머니는 몸으로 이를 알기에 모자관계는 명백한 관계다. 그러나 아버지가 한 다리 건너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자식으로 인지해야 부자관계가 성립된다. 미혼모는 아이 아버지가 없어도 어머니로 인정된다. 반면 미혼부가 아버지로 인정받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가족관계등록법에서도 혼외자의 출생신고자를 어머니로 제한하고 있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는 탯줄로 이어진 매개가 없는 관계이다.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자라서 생모를 찾으러 한국으로 돌아온 사례는 많이 접할 수 있다. 비록 한 때 자기를 어떤 이유로 버렸건 간에 어머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반면에 ‘생부’를 찾겠다고 돌아온 입양아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인지를 매개로 한다. 아버지가 자식을 인지하여 호적에 올리고 성을 물려주면 부자관계가 성립된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누구라도 성을 물려주면 아버지가 된다는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만 자식에게 ‘호부호형’을 허하는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다. 자식에게도 자기 마음에 드는 족보를 꾸밀 권리가 있다. 족보를 만드는 것은 자기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함이다. 그래서 ‘내 아버지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자식인가?’는 자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근본적인 질문이 된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들을 관찰하여 이들이 자기 생애를 고쳐 쓰려고 온갖 이야기를 꾸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중에 이 이론을 원용하여 이것이 바로 소설의 기원이라고까지 말한 사람도 있다. 

  실제 가정에서는 어머니보다 존재감이 미미한 아버지이지만 소설이나 연극, 영화에서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다루는 작품이 훨씬 많다.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자식에게 명백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자식들이 아버지와 관계설정하기가 힘들고, 훨씬 더 갈등 상황에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설이나 연극, 영화에서 아버지가 긍정적으로 묘사된 것은 드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식에게 선험적 존재인 아버지는 과거 가치와 권위의 상징일 수 있고, 이런 이유로 아버지는 자식의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가 될 수 있다. 이럴 때 오이디푸스적 도식에서 친부살해의 테마가 나올 수도 있고,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열망이 아버지를 아예 내러티브에서 지워버리고 자수성가한 인물이나 고아를 주인공을 내세울 수도 있다. 신분제 사회는 사라졌지만,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의 재력이 또 다른 신분제의 근간이 되었다. 그래서 “아부지 뭐 하시노”란 말은, 자식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현대판 숙명을 상기시킨다.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될 경우, 아버지는 자식에게 억압기제로 인식될 수도 있고, 반대로 무능한 아버지의 경우에는 자식의 앞날을 막는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될 수도 있다.

  어머니 손맛은 비교가 불가능한 절대적 가치를 가진 것의 상징으로 거론된다. 반면 아버지가 준 세뱃돈이나 크리스마스 선물은 당장 그날로 비교의 대상이 된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바람직한 아버지에 대한 표상이 있게 마련인데, 자식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이와 비교하여 실망할 수 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유산만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빚도 물려 줄 수 있다. 아버지의 빚을 떠안게 된 자식들은 상속을 거부할 수 있다. 혈연이라는 피의 논리로 아버지와 자식을 숙명적 관계로 묶어 놓던 거대 담론이 사라진 오늘날, 아버지는 더 이상 자식에게 선험적 존재가 아니다. 요즘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버지들이 자식 앞에서 생쇼를 해야 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자식에게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하면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담론을 만든다. 그래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혈연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담론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