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독립운동 기념사업회 김희선 위원장 김혜선 기자 memober@ewhain.net

  <편집자주> 본지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후손 인터뷰 연재를 기획했다. 이번 호에서 만난 사람은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김희선 회장이다. 김 회장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김성범씨며, 작은할아버지는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항일투쟁을 했던 김학규 장군이다. 김 회장은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를 통해 역사 속에 드러나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에게 여성 독립운동가와 본교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해 들어봤다.

  4일 김 회장을 만난 곳은 서울시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는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에는 역사책들이 수북이 쌓인 책장 옆에 따뜻한 전기장판이 마련돼 있었다. 마땅한 테이블이 없어 인터뷰는 바닥에 앉아 진행됐다. 달궈진 전기장판만큼 김 회장의 뜨거운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정신과 그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작년부터 사업회를 만들어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일을 시작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점이 김 회장의 여성 독립운동가 연구 활동에 영향을 미쳤느냐고 묻자 김 회장은 손사래를 치며 의외의 답을 했다.

  “물론 자라면서 할머니로부터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던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이 내 안에 항일 정신이나 분노를 키우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김삼웅 전(前) 독립기념관장이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 등 많은 분께서 제가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명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주셨고, 그것이 이 일을 시작한 큰 원동력이었죠.”

  김 회장은 집안 사정 때문에 고등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흔히 그랬듯, 생계가 어려웠던 탓이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자금을 댈 정도로 원래는 유복했던 환경이었지만 독립운동으로 집안의 생계를 이어나가기 힘들어졌다. 김 회장은 어릴 적엔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독립운동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힘들게 사는 것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어렸을 때는 할머니한테 ‘독립운동이 대체 뭐가 좋은 거냐’라며 모진 소리를 많이 했었어요. 생계가 어려웠으니까요. 특히 작은할아버지는 독립군이었기 때문에 많이 도망 다니고 집 안에 있는 때가 드물었어요. 그래서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함께 추억을 나눈 시간도 부족했죠. 물론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으면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행동들이 자랑스럽고 이해하게 됐지만, 생각이 바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죠.”

  그런 그의 생각을 움직인 것은 민주화 운동 경험이었다. “저도 1980년대 민주화 투쟁 시위에 나서면서 아들 도시락 한 번 싸준 적이 없었어요. 유치장에 가기도 하고 자식과 함께 있던 시간이 부족했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할아버지가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김 회장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나 독립운동 이야기를 아직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그중 그는 작은할아버지인 김학규 장군에 관한 재미있지만, 마음이 아픈 이야기를 들려줬다.

  “작은할아버지가 독립군으로 활동했을 때, 일반 가정집으로 도망가서 숨은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독립군이 집에 오면 모두 한마음이 돼 독립군을 숨겨줬거든요. 작은할아버지가 숨은 방에는 흰 여자 소복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소복을 입고 떡을 썰면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했다고 해요. 시간이 지나니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의 이야기들을 많이 잊어서 아쉽지만, 이 이야기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어요.”

  김 회장은 자신의 이야기보다 숨겨진 여성 독립운동가와 이런 활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것뿐 아니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 정신을 후손들이 기리는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위안부 문제도 시급하지만 나라를 위해서 투쟁한 여성을 기리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역사에선 유관순 열사 이외에는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 배우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여성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죠.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을 모시고 존경하는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야 해요. 이런 문화가 형성돼야 앞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앞장서 싸워야 한다는 사회 정의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유관순 열사를 제외하면 우리가 아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많지 않다. 그렇다고 여성이 남성보다 독립을 활발하게 전개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는 게 김 회장의 말이다. 그는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남성 독립유공자가 약 1만4000명이지만 여성은 고작 246명”이라며 “많은 여성이 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그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 많은 여성이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여성의 문맹률이 높아 상대적으로 그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 속에 기록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 당시 여성은 시부모를 봉양하고 독립운동 나간 남편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대신해 농사를 짓는 경제 활동까지 담당했어요. 많은 일을 했는데 역사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은 너무 억울하잖아요. 여성이 한 일을 소위 뒷바라지라고만 하는 건 그들의 노력을 폄하시키는 거예요. 여성이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았다면 남자가 어떻게 나가서 독립운동을 했겠어요. 여성이 한 역사적 과업을 기록하는 일이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김 회장은 이제야 겨우 역사책 속에 기록되기 시작한 여성 독립운동가인 남자현 의사와 윤희순 의사에 관해 설명했다. 남 의사는 ‘여자 안중근’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김 회장은 “남자현 의사는 남편을 따라 의병투쟁, 의병대장 등 위대한 일을 했다”고 말했다.

  남 의사는 남편이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다 사망하자 남편과 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 의병투쟁을 시작했다. 남 의사는 일제 침략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조사단에 일제의 만행을 직접 호소하려는 계획을 세워 실행했다. 그 계획은 왼손 네 번째 손가락 두 마디를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란 혈서를 쓰고 자른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도 단지(斷指)한 뒤 혈서를 썼잖아요. 남자현 의사도 손가락을 자르는 투지를 보였기 때문에 ‘여자 안중근’이라고 불리고 있어요.”

  윤희순 의사는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였다. 윤 의사는 여자 의병 30여 명을 모집해 다른 의병을 돕거나 군자금을 모아 탄약 제조소를 운영하는 등 의병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의병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후방에서 그들을 지원하며 의병운동에 힘을 실었다.

  이어 김 회장은 “나라에서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이나 포장을 줌)을 받지 않았더라도 우리의 모든 할머니는 독립운동가였다”고 말했다. 여성은 아기를 업고 다니며 경고문을 붙이고 포탄을 전달하는 등의 일을 했지만 대부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활동하다 보니 역사에 많이 기록되지 못했다.

  “제 친할머니는 독립유공자는 아니지만 독립운동가예요. 우리 할머니 손가락을 보면 굳은살이 박혀있었어요.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왜 굳은살이 생겼느냐고 물어보면 마을의 아낙네들이 모두 모여 독립군 옷을 바느질하느라 굳은살이 박혔다고 해요. 옷감이 두꺼워서 바느질하기 어려워 굳은살이 박히셨대요. ‘얼마나 많은 옷을 바느질했으면…’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일도 독립운동이었다고 생각해요.”

  국가에서 서훈을 받았던 여성 독립운동가 246명 중 본교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는 약 20명이다. 전체의 약 10%에 달하는 수준이다. “이화학당이 여성 교육에 앞장섰기 때문에 여성 독립유공자가 많은 편이에요. 활동한 내용을 담은 역사적 자료가 있었고,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당시 시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그만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 같아요.”

  김 회장은 대표적인 본교의 여성 독립운동가로 이애라 여사, 김독실 여사, 홍애시덕 여사 등을 소개했다. 그중 이 여사는 감옥살이하며 일본 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 여사는 독립운동가인 남편 이규갑과 결혼한 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여사는 3?1 독립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평양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이후 석방이 되자 바로 동료들과 독립지사 후원 모금 운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 여사는 100일 된 어린 딸아이를 독립운동 중 잃기도 했다. 아이를 업고 아현동 너머 친정 형님 집으로 가던 도중에 일본 헌병을 맞닥트려 등에 업은 아기를 빼앗겼다. 일본 헌병은 아기를 빼앗아 길에 내동댕이쳤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이 여사는 체포됐다. 이 여사는 아이의 죽음이라는 아픔을 안고 애국부인회를 결성해 모금 운동과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등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김 회장은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이 역사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독립운동 정신을 공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당시의 시대정신이 자주독립이었는데 우리 세대도 그 정신을 본받아 후손들에게도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청년들이 위안부 문제 등 해결되지 않은 역사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공부도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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