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의 손녀라는 타이틀은 저에게 아름다운 구속이었죠"
"윤봉길 의사의 손녀라는 타이틀은 저에게 아름다운 구속이었죠"
  • 남미래 기자
  • 승인 2015.0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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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윤주경 관장 홍숙영 기자 jikkal@ewhain.net

  <편집자주> 본지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후손 인터뷰 연재를 기획했다. 독립운동가의 알려지지 않은 삶과 후손들의 이야기를 듣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선조에 대한 감사함을 깨닫기 위해서다. 첫 번째 주인공은 윤봉길 의사의 손녀이자 최초의 여성 독립기념관장인 윤주경 관장(화학·81년졸)이다. 2월27일 윤 관장이 있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관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머그잔 크기의 작고 하얀 윤봉길 의사의 흉상이 눈에 띄었다. 흉상에서 윤봉길 의사를 존경하는 윤 관장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윤 관장은 최초의 여성 독립기념관장이 된 소감에 대해 “어깨가 무겁다”고 입을 뗐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독립운동가 후손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니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윤 관장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윤봉길 의사의 손녀라는 사실이 마음속 짐이 되기도 했었다며 말을 이었다. “어린 시절에 우스갯소리로 ‘우리 할아버지는 의사지만 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야’라고 했다가 된통 혼난 적이 있어요. 할아버지는 농담이더라도 입에 가볍게 올려선 안 되는 분이니까요. 그때 이후로 ‘나의 사소한 행동 하나가 할아버지에게 누가 될 수 있구나’하고 느껴 모범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이러한 구속은 오늘의 윤 관장을 있게 했다. 사소한 행동까지 조심해야 하다 보니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한 그는 어린 시절에는 윤봉길 의사의 손녀인 사실도 쉽게 밝히지 않았다. 윤봉길 의사의 손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부담을 느끼며 멀어지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주변 사람들의 격려와 응원은 그가 마음을 고치는 계기가 됐다.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의 부담감을 떨쳐내고 싶었어요. 자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할아버지와 같은 분들이 나라에 목숨 바쳐 헌신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라며 자긍심을 가지라는 말을 듣게 됐죠. 어릴 때는 듣기 싫었던 어머니의 잔소리도, 제가 자라왔던 환경도 모두 ‘아름다운 구속’이란걸 깨닫게 됐어요.”

 교과서 밖의 윤봉길 의사 '아내와 눈도 못 마주쳤던 수줍은 청년'

  윤 관장에게 듣는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 중에는 새롭고 재미있는 내용이 많았다. 윤 관장의 할머니에 따르면 윤봉길 의사는 아내는 남편의 말에 순종해야 하는 시대적 풍토와 달리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윤 관장은 윤봉길 의사를 ‘아내 앞에서는 한없이 수줍었던 젊은 청년’이었다고 묘사했다. “남존여비사상이 강했던 일제강점기에 할아버지(윤봉길 의사)는 할머니(윤봉길 의사의 부인)가 집안일로 바쁘면 아버지(윤봉길 의사 아들)를 안고 야학을 하러 가곤 했어요. 아내에 대한 배려심이 참 크신 분이었죠.”

  윤 관장은 웃음을 터트리며 윤봉길 의사가 아내에게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였던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할아버지가 고모할머니(윤봉길 의사의 여동생)와 할머니한테 한글을 가르쳤는데, 고모할머니가 못하면 호되게 혼냈지만 할머니가 못하면 눈감고 쓱 지나가셨다고 해요. 이 모습을 본 고모할머니는 ‘오빠는 똑같이 못 하면 똑같이 혼내야 했는데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셨대요.”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윤봉길 의사의 아내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마지막 유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윤봉길 의사는 유서에서 두 아들에게 “에디슨이나 맹자,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동시에 “너희 어머니는 자녀를 훌륭하게 키울 수 있는 소양을 가진 어머니”라고 표현했다. 아내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과 믿음, 존경을 느껴지는 대목이다.

  윤 관장이 생각하는 윤봉길 의사는 ‘젊은 나이였지만 시대를 고민하고 자신이 해야할 일과 실천할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분’이다. 3?1운동 당시 윤봉길 의사는 초등학생이었는데도 학교에서 받는 교육이 일제 식민지배에 순응하는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서당에 가서 일제에 순응하지 않는 한학(漢學)을 배웠다. 문제는 한학으로만 급변하는 시대적 흐름을 읽어낼 수 없었다. 윤봉길 의사는 새로운 시대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신식학교에 다니는 친구의 책을 빌려 끊임없이 읽었다. 시대에 대한 고민과 노력은 끊임없이 나라의 독립을 열망하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윤봉길 의사를 만들었다.

 

  남겨진 독립운동가의 가족의 삶 "윤봉길 의사만큼 강직한 증조부모와 할머니가 버텨주었다"

  24살, 윤봉길 의사는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의거했다. 윤 관장은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었던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남겨진 가족의 삶에 대해 들려줬다.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의 가족은 생활고를 겪는 경우가 많았지만, 윤 관장의 가족은 윤 관장의 증조부(윤봉길 의사의 아버지)가 집안의 기둥이 돼 생계를 이어나갔다.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본 순사들은 심심하면 집안에 불쑥 찾아와 독립운동단체와 연락을 하는지, 남겨진 가족이 독립운동을 하는지 들쑤시곤 했다. 그때마다 윤 관장의 증조모(윤봉길 의사의 어머니)가 나서서 ‘이렇게 집안을 매번 찾아와 쑥대밭을 만들 거면 나를 죽이고 가라’며 강경하게 대응했다고 한다. 윤 관장의 증조부모(윤봉길 의사의 부모)가 경제적인 면에서나 일본의 핍박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한 덕분에 윤 관장의 할머니(윤봉길 의사의 아내)가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살아올 수 있었다.

  홀로 떠난 남편이 원망스러울 법도 했지만, 윤 관장의 할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윤 관장은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전혀 내비치지 않는 분이었다고 설명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그리워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언젠간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윤봉길 의사의 사형집행소식을 들었지만, 동구 밖 신작로를 자주 내다보셨다고 해요. 혹시나 돌아올까 봐…. 심지어 6·25전쟁이 끝난 후에도 집에 돌아가는 군인들을 보며 ‘혹시 내 남편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항상 할아버지를 기다렸다고 들었어요.”

  윤 관장의 아버지는 윤봉길 의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학교에 다닌 그는 교사에게 학생들 앞에서 ‘이 학생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고 이 학생은 이 땅에서 가장 나쁜 사람의 아들’이라며 핍박을 받았다. “그때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크게 상처를 입고 이후 아버지는 자기 자식이 나쁜 사람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 답답할 정도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아요.”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선조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깨달아야" 역사의 교육성 강조 

이어 윤 관장은 역사 과목을 필수로 지정하는 방법으로라도 우리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역사를 기억하고 배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역사가 우리 정신 안에 스며들어와 얼이 된다고 봐요. 역사를 제대로 안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고 그 자긍심이 미래세대를 열어가는 힘이 되는 거죠.”

  재작년, 김활란 전 총장의 친일적 행위를 규탄하며 김활란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플래시몹이 본교에서 열렸다. 이에 대해 윤 관장은 역사적 인물에 대해 공정하게 기록하고 기억하며 바라봐야 한다는 의견이다. “김활란 전 총장은 여성교육을 위해 힘쓴 의로운 점이 있지만, 분명히 잘못한 부분도 있어요. 잘못한 것으로 잘한 것을 가려서도 안 되고, 잘한 것으로 잘못한 것을 가리지 않는 공정한 시선을 가져야 해요. ‘아, 저런 면은 배울 점이 있고 이런 면은 본받지 않아야겠다’라는 태도로요.”

  윤 관장은 청년들이 독립운동의 의미를 오늘날 다시 해석해서 되새겼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모든 독립 운동가들이 다음 세대에게 나라를 잃은 어려움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절실함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 절실함을 기억하며 불황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현재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고난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잖아요.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것이 오늘날의 독립운동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최초의 여성 독립기념관장이 그리는 독립기념관의 모습 "애국의 정신을 기를 수 있는 곳"

  윤 관장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최초의 여성 독립기념관장이라는 타이틀이 무겁다. 그는 해외로 찾아가는 독립기념관, 연변대학과 학술연구, 중국과 국제교류전시전 등 독립기념관의 세계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독립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만을 열망한 운동이 아닌 세계평화를 외치는 운동이에요. 실례로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 간디의 비폭력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죠. 이처럼 독립기념관도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해외와 학술교류, 국제교류전을 펼치면서 세계평화기념관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국민의 관심에서 탄생한 독립기념관은 1982년 일본이 역사교과서 왜곡을 시작한 이후, 올바른 역사를 지키기 위해 국민들이 직접 모은 성금으로 1987년에 건립됐다. 윤 관장은 이러한 기본의 정신을 이어나가며, 모든 국민이 독립기념관에서 국가 발전을 위한 가치로 애국심을 느끼길 소망했다. 그는 애국심은 국가의 존속과 관련된 것이라며 현대 사회에서 잘 느끼지 못하는 애국심에 대해 강조했다. “애국심은 국가의 원동력이며 현재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치예요. 독립기념관은 젊은이들이 독립운동 시대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독립운동기지, 전차 모형 등 그 시대를 느낄 수 있도록 재현했어요. 그 시대에 들어가서 애국심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외에도 독립기념관에서 어떤 전시가 열렸으면 좋겠는지 우리 이화인들에게 물어보고 싶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