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추억답게 소중히 간직하며 그 힘으로 열심히 살면돼

  요조의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라는 노래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어딘가 정말로 영원이라는 정류장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시들지 않은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우리 영원까지 함께 가자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의 영속성을 꿈꾸지만 그 끝을 알기에 더욱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연인의 모습은 마치 영원을 꿈꾸는 인간의 군상을 바라보는 듯하다. 연인을 영원히 사랑하고픈 마음, 그리고 그 사랑이 영원토록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은 어린아이의 동화 속 내용 같다. 눈길을 돌리기만 해도 온갖 현실적인 장애물이 가득한 이 세계에서 영원을 꿈꾸는 것은 얼마나 비현실적이며 몽환적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영원했으면 하고 바라는 순간은 있다. 처음 사귄 남자친구와 함께 걸었던 밤거리. 겨울날 친구와 함께 마셨던 캔 커피의 향기. 봄이 되면 새파란 하늘을 수놓는 벚꽃과 향긋한 꽃향기. 학창시절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함께 떠들었던 복도. 오래된 기억일수록 시간이 덧씌워지고 흐려지기 마련이지만, 이 순간들만큼은 어떠한 형태로라도 간직하고 싶다고 말하는 나는 어리석은 존재인걸까.

  한번은 졸업한 고등학교를 찾아가본 적이 있다. 힘겨운 달리기 끝에 도착한 대학이라는 곳은 나에게 어색한 공간이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과 비단 다르지 않은데 어느새 나를 어른이라고 칭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홍수 속에서 내 행동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숨이 막혔고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현실에서 도망을 쳤다.

  어쩌면 나는 추억이라는 굴레에 잡혀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도착한 고등학교에는 내가 쓰던 책상도, 항상 나를 기억해주시던 매점 아주머니도, 언제나 교무실을 지키셨던 담임선생님도, 나와 함께 떠들었던 친구들도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내 기억속의 장소에서 학교는 이미 흘러간 시간을 넘어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 있었다. 똑같은 공간 속에서 오히려 나는 내가 타인이 된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나는 이 장소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대로 남아있는 것도 없다. 오히려 시간이라는 잔인한 마법은 이미 사라져 버린 내 추억을 더욱 아련하게 만들기만 할 뿐이다. 결국 추억은 추억일 때 아름다운 법이며 추억을 들추는 순간 우리는 눈앞의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추억이 영원하지 않다고 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추억은 추억으로 존재할 때 우리에게 힘을 준다. 기억 속에서 반짝이는 순간들은 우리가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원동력이 된다. 그땐 그랬지- 라며 과거를 그리워함과 동시에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한 걸음이 되는 것이다. 모르는 것 투성이의 청춘 한가운데에서 표류하는 우리에게 추억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 방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과거와는 다른 선택을 할 기회를 줄 수 있기에, 기억은 변질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것이 되는 게 아닐까.

  영원하지 않아도 의미가 있는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을 역설적 영원을 믿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비극으로 가득한 현실 세계에서 영원이라는 비현실을 꿈꾸는 인간들은 우리는 결코 낭만적이거나 꿈에 젖은 몽환가 들이라고 비판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추억은 추억답게 소중히 간직하면 된다. 그리고 추억이 부여하는 힘을 통해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유명 드라마 작가가 이렇게 말했던가. 세상이 말하는 모든 비극이 결국에는 희망을 꿈꾸는 역설인 줄을 알아야 한다고. 나는 영원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봉한 기억속의 내 학창시절이 또다시 되살아날 수 없듯이, 봄에 흐드러지게 폈던 벚꽃도, 한 겨울의 자판기 커피 냄새도, 헤어진 남자친구와 함께 기다렸던 버스 정류장도 다시 되살아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모든 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박제시키고 싶은 이유는 영원하고 싶을 만큼 행복했기에, 그래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 역시 그만큼 행복하기를 바라는 역설적인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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