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대회」민간주도 남북대화 물꼬 터

지난 15일, 분단장벽을 허물기 위한 7천만 겨레의 또 한번의 시도였던 범민족대회가 무산된 채 끝났다.

범민족대회는 단순한 교류의 차원을 넘어 한반도 평화보장방안과 통일원칙 및 방도를 내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렇기에 이 대회에서 남·북·해외동포가 모이는 장소는 분단의 모순을 가장 극명히 드러내는 판문점으로 정해짐으로써 이 대회의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고자 했다.

범민족대회는 지난 88년 8월 남한측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전민련)을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에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89년 2월 베를린에서의 범민족대회 성사를 위한 1차실무회담과 90년 7월 26일 2차실무회담을 거쳐 범민족대회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이와 함께 학생운동쪽에서는 88년부터 시작된 통일열기가 더욱 높아가는 가운데 전대협 통일 선봉대를 꾸려 통일운동의 전국민적·전국적 확산을 위해 「전면개방·자유왕래 실현 및 범민족대회성사를 위한 국토종단대장정」을 시작하였다.

「전면개방팀」과 「자유왕래팀」으로 나누어 전국을 순회했던 전대협 통일선봉대는 곳곳에서 대국민선전을 펼침으로써 큰 호응을 얻었다.

계속되는 구보·집회·가두시위로 인해 몸은 지칠대로 지치고 경찰의 폭력적인 탄압을로 조석제군(경상대·법학·2)을 비롯한 50여명의 부상자가 속출하는 속에서도, 통일선봉대는 10여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13일 서울에 입성하였다.

또한 8월 1일~ 10일 청주교도소앞에서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이하 서총연) 산하 덕성여대 이현경양(사회학·4)을 비롯한 애국결사대는 임수경 석방을 위한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번 단식투쟁은 범민족대회 성사의 전제조건이며 동시에 통일의 전제조건인 「국가보안법철폐와 양심수 석방」을 위해 임수경양이 수감되어 있는 「청주교도소」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전개되었다.

한편, 서총연 산하 서부지구에서는 전대협의 기본방침과는 조금 다르지만 각 학생들을 더욱 통일의 주체로 나서게 한다는 의도하에 「방북투쟁」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준비와 국민들의 관심속에서 지난 13일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범민족대회 개막식이 있었다.

이어 15일에는 「8.15 광복 45주년 기념식 및 범민족대회 출발식」이 진행되었다.

각계각층 대표들은 이 출발식에서 각각의 결의를 밝힌 후, 판문점으로 향했다.

그러나 경찰은 교문을 나서는 대표단과 환송단에게 『나가려면 대표단만 나가라』며 무력으로 원천봉쇄하여, 그 과정에서 심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8.15일의 범민족대회는 무산된 채 규탄집회로 이어졌다.

이날 오후 2시 「범민족대회 보고 및 원천봉쇄 규탄대회」에서 전대협 송갑석 의장은 『정권은 최루탄과 방패로써 범민족대회를 무산시켜 그 반통일성을 드러냈다』라고 규탄했다.

또, 전민련 이해학 집행위원장도 『범민족대회 무산을 통해 「7.20 특별담화」가 기만임이 극명해졌다』고 덧붙였다.

범민족대회도 무산되었고, 서총연 서부지구의 특화된 사업방침이었던 「방북신청」도 정권의 「선별방북」이란 미명아래 좌절되었다.

이를 통해 「7.20 특별발표」는 6월 임시국회에서 각종 악법의 날치기통과라는 파행적 국회운영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무마시키려는 의도하에 발표되었음을 정권 스스로 밝히고 만 격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의 근거는 「7.20 발표」가 방북절차·방법 등을 거의 제시하지도 않았으며, 판문점이라는 제한된 지역과 5일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으로 결국 교류불가능을 귀결시켜내는 데에서 잘 나타난다.

또 정권은 「반국가단체로의 잠입·탈출죄」등을 규정해 놓은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둔 채, 89년 방북을 이유로 임수경양을 구속해 놓은 채, 민족대교류를 발표하는 모순을 드러냈다.

결국 범민족대회도 방북신청도 무산되었다.

그러나 범민족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한 투쟁은 전세계에 남·북·해외 7천만 겨레의 통일의지를 널리 밝힌 성과를 지닌다.

또한, 통일운동을 전국민적·전계급적으로 확산시키고, 학생운동에 있어 그간의 단절적이었던 통일투쟁을 항시적·일상적으로 책임질 주체인 「조국의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위한 학생추진위원회」(이하 학추위)를 발족시킨 것도 일련의 성과로 평가된다.

그러나 연세대에서만도 2만여명이 집결해 자주통일을 외쳤던 「범민족대회 성사투쟁」은 몇가지 한계점을 노출시켰다.

먼저 범민족대회에 대한 사전준비 미흡을 들 수 있다.

각과 성원주체가 범민족대회의 의미를 단순한 교류가 아닌 통일방안을 내놓기 위한 투쟁으로써 인식하지 못한 채 감정적 차원에서 통일을 염원하였다.

또 전대협에서도 통일된 방침이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채, 서부지구의 방북투쟁을 성급히 진행시킨 것 또한 한계로 남는다.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역시 준비과정의 미흡속에 대회성사에만 급급해 판문점이라는 상징적 장소를 끝까지 고수하지 못한 채 「서울-평양 교류개최안」을 내놓는등 다소 정부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둘째로 학추위가 몇개 지역밖에 결성되어있지 않은 상황속에 서총연 및 전대협 학추위를 급결성했으며, 그 과정에 각 과단위와의 결합과 의견수렴 과정이 부족했다.

세째로 전면개방·자유왕래의 원칙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함으로써 맹목적으로 교류에 매몰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원칙은 통일을 위해서는 단순한 문화적·경제적 교류가 아닌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총연 학추위장 이재진(시립대 총학생회장, 지역개발·4)씨는 『앞으로의 통일운동은 이런 한계를 극복함과 함께 반민자당 투쟁과 결합해야 한다』고 밝힌다.

이러한 기본기조 아래 서총연 학추위는 이번 하반기 사업으로 비핵군축방안인 군복무기간 축소투쟁과 천개과 교류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 민족의 통일은 주어지는 것이 아닌 쟁취하는 것임을 각인해야 할 때다.

진정한 통일은 진정으로 민주화된 사회를 토대로 요구한다.

그러므로 국가보안법 철폐없는 정권의 북방정책은 기만임을 철저히 인식하고, 반민주·반통일 요인의 척결에 앞장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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