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에게 고통을 주는 평가제도 속, 연구자로서의 책무 잊지말아야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이대학보의 원고청탁을 받고 학기 말 즈음에는 쓸 수도 있겠다 답한 기억은 나는데, 에잇, 끝내지 못한 일들과 허덕이다 보니 괜히 미룬 것이 후회가 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바쁜 것일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평가 때문인 듯하다.

  장기적인 연구과제에 선정되었다 하더라도 거의 매년 평가를 받아 연구가 중단될 것을 각오하고, 혹은 염두에 두고 프로젝트를 진행시켜야 한다. 이러한 상시적인 불안상태가 연구를 잘 수행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만든 것 같은데, 긴 호흡으로 연구 기획에 맞게 운영하기보다는 중간에 중단되었을 경우의 부담에 맞서기 위해 단기적인 성과를 만들어내는데 집중하는 아쉬움과 자괴감이 만만치 않다.

  실제로 연구책임자 업적이 평가에 미치는 비중이 더 커지고 나서는 모든 것을 이 평가 기준에 맞추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일본 공동연구자의 요청으로 등재지도, SSCI도 아닌 일본 학술지에 논문을 싣게 되었을 때에는 -비록 후회는 없었지만- 연구재단의 기준으로는 평가 점수를 전혀 받을 수 없다는 점이 몹시 아쉬웠다. 영국 친구가 에디티드 볼륨의 한 챕터를 공저하자 제안했을 때는 즉시 거절하였다. 전공분야와 거리가 있어 궁극적으로는 거절했겠지만, 조금 더 고민하고 미안해하는 대신 평가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제안을 한 친구한테 심지어 약간 짜증까지 났던 기억이 난다. 유럽의 한 저널에서 세계적인 석학의 주목받는 신작에 대해 리뷰 심포지움을 기획한다며 북 리뷰를 요청했을 때에는 -대학원 때 그토록 좋아하던 학자라 정말 기쁘고 기대되는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처 끝내지 못한 내 논문부터 완성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무려 사흘을 고민한 끝에 간신히 참여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북 리뷰도 물론 점수가 되지 않는다.

  해외에서 오랜 연구 활동의 경험이 있는 어느 한국인 학자는 우리는 왜 연구를 이것밖에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사유서를 제출하느라 바빠 정작 연구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모든 제도는 그 사회가 처한 맥락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평가제도가 우리나라에서 정착한 것은 아마도 연구비를 제대로 연구에 사용하지 않은 아주 소수의 연구자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연고에 따른 봐주기를 막고 제대로 된 질적인 평가를 가능케 하는 객관성이 각 분야마다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구조조정과 개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대학에 대한 평가기준과 제도도 매우 편파적이거나 근시안 적이며, 그로 인해 많은 대학이 고통 받고 있다. 이 역시 대학은 스스로 평가하고 발전할 능력이 없다는 생각 하에 만들어진 제도일 것이다. 물론 이에 해당하는 소수의 대학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소수가 저지를 지도 모르는 잘못으로 다수에게 고통을 주는 제도를 이처럼 유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전면적인 고민과 검토가 물론 필요하겠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살아온 나의 경험은 아마도 그 맥락이 수정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할 것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북 리뷰 사건으로 스스로에게 꽤나 실망한 이후에는 이런 평가제도 하에서 내가 가져야 할 태도와 원칙에 대해 보다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연구는 연구자가 평생 해야 할 부담스럽지만 매우 달콤한 책무이며, 거기에는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을 알아내고 싶다는, 그리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조금 더 낫게 만들고 싶다는 단순하고 강렬한 바람 말고는 아무 것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가능하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학문 커뮤니티와의 소통을 시도하고 유지하여야 하는 의무를 지켜야 함도 물론이다. 제도는 그대로 있겠지만, 그 제도를 바꾸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사람일 터이니.

  그 논문은 아직도 끝내지 못했다. 덕분에 나에 대한 나의 평가는 꽤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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