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쓴 글을 읽는다는 것, 생각에 잠기거나 혹은 도약하거나

  필자는 스스로를 과거지향적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다. 어릴 때는 분명 남들보다 눈물이 많고 과거에 연연하는, ‘감수성 짙은’ 아이였다. 그런 필자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는 날의 반편성이었다. 친한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던 경험이 단 한번도 없을 정도로 반편성운은 언제나 나빴다. 그래서 친구대신에 1년간 쓰던 책상을 데리고 갔다. 그렇게 중학교 3년간 같은 책걸상을 쓰고 졸업했다. 졸업식이 있던 날 그 책상에 앉아 너무 오래 우는 바람에 졸업생 중 가장 마지막으로 학교를 나왔다. 이별을 유난히 힘들어 한 만큼 과거라 불러야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한동안 앓아야 했다. 그리고 그런 때의 필자는 좀 어두웠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진부한 명언이 늘 필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밝게 명랑하게만 지내는 것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때 느끼는 생각들을 붙잡아 기록하는 버릇을 들이라고들 말한다. 필자는 태생이 게을러서 계획을 세우는 것은 고사하고 어쩌다 겨우 플래너를 잡고 써둔 것을 지키는 일에도 소질이 없다(약속은 꼭 지킨다). 꾸준히 기록하기와 필자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어디다가 쏟아 내야 할 지 몰라 안절부절할 때는 두서없이 왕창 써 갈기곤 했다. 나 좀 봐달라고 한 글자 한 글자 몸부림을 쳐대면서 말이다.

  가끔씩 써둔 글을 읽어 보곤 한다. 최근에 필자가 써왔던 글을 읽으면서 문득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것은 가끔 훔쳐보는 8살 어린 동생의 일기장을 볼 때와 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이었다. 자신이 써둔 글을 읽는 것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서 갖게 되는 주관적인 생각을 차갑게 만들어준다.

  필자가 스스로를 과거지향적 인간이라고 오해한 데는, 사진과 동영상 속 그저 해맑기 그지없던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던 나”의 표정이 있었다. ‘이별 후 몸살’기간에 사진 감상이 빠질 수 없다. 사진들을 볼 때 마다 ‘아 저 때는 참 행복했더랬지.’, ‘저 때는 내 옆에 함께 찍힌 저 사람과 참 좋은 사이였지.’, ‘왜 지금은 저들과 저리 웃을 수 없는 걸까.’,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듯하다.’, ‘저 때처럼 저들과 함께 웃고 싶다.' 식의 후회를 늘어놓았다. 과거의 순간을 아름답게만 담아두는 데 성공한 사진과 동영상들은 당연히 그때를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도록 해줄 뿐이다. 그래서 사진을 보면 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이제야 알다니 스스로가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글들은 그것을 쓰던 때의, 며칠이나마 더 어렸을 때의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고, 어리석고, 철없고, 무지했고, 이기적이었고 못됐었는지 깨닫게 해줌으로써 후회의 감정을 느끼게 하지만 사진이 부르는 후회와는 다른 마음을 먹게 한다. ‘과거에 조금만 더 잠겨있자.’가 아니라 ‘아! 저건 진짜 아니다. 좀 더 어른스러워 져야 할 텐데.’

  예전의 글들을 볼 때마다 그 글을 지우면 그때의 어리석은 ‘나’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자란 ‘나’로 하여금 스스로의 어리석었음을 이따금씩 느낄 수 있도록 이렇게 기록행위를 지속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차피 부끄러움 밖에 남지 않을 이 글쓰기를 굳이 계속 할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작가의 꿈은 꾸지 않아야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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