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를 억압하는 사회적인 시선 거두고 육우당의 희생 기억해야

 

 2003년 4월 25일 금요일 오후, 동성애자인권연대(이하 동인련) 사무실에서 한 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이름은 육우당. 그는 19살의 시인이었고, 동성애자였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소수의 언론만이 그의 죽음을 보도했고, 그중에서도 한 신문은 동성애자를 비판하는 글과 사설을 반복해서 실어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성소수자 인권운동가들은 육우당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으며, 함께 각국에서 추모 조전들이 날아왔다. 그것은 한 동성애자의 희생에 대한 애도인 동시에 그의 죽음이 사회적 타살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육우당이라는 이름은 녹차, 파운데이션, 술, 담배, 묵주, 수면제를 여섯 친구로 여긴다고 하여 그가 스스로 붙인 별명이다. 묵주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천주교 신자였다. 한 때 기독교계 인사들의 동성애에 대한 비난으로 ‘묵주’와 절교를 선언했던 그는, 이내 가톨릭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그 선언을 철회했다. 그는 커밍아웃 이후 이어진 친구들의 냉대와 따돌림 때문에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자퇴 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갔으며, 번 돈의 일부를 지속적으로 동인련에 후원하며 인권 운동에 일조했다. 19살부터는 온라인 회원에서 벗어나 동인련의 상근 활동가가 되어 직접 활동하기 시작했고, 짧은 두 달여 간의 활동 끝에, 그는 자살을 선택했다. 그는 유서에 성소수자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자신의 목숨은 아깝지 않다고 썼으며,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써달라고 자신의 전 재산인 34만원을 곁에 둔 채 생을 마감했다.

 육우당의 희생으로 ‘동성애’는 1년 후에 청소년 유해매체물 심의기준과 인터넷 금칙 언어에서 삭제되었다. 또한 동성애를 포함한 사회적 차별을 지양하는 차별금지법 제정 여론이 등장하였으며 2010년에는 청소년 동성애자를 비롯해 학생들의 인권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룬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었다. 그러나 육우당의 희생 그 이후 10년이 넘게 흐른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에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그가 동성애 차별을 반대하며 외치던 말들은 아직까지도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들의 입에 오르고 있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위한 운동은 결국 사회적 반발에 부딪쳐 대부분 무산되는 게 현실이다. 차별금지법은 일부 반대 단체의 반발에 부딪쳐 성소수자 관련 항목을 빼 버린 채 입법하려고 했고, 국립국어원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개정되었다가 역시 반대 단체의 반발로 재개정되었다. 나라를 대표하는 기관들이 일부 단체의 반발로 결정을 번복함으로써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자꾸만 가로막음을 부정할 수 없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성소수자들의 삶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성 정체성이 아닌,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다. 육우당은 유년기부터 시인의 꿈을 키운 소년이었고, 시를 통해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성소수자의 해방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로 사회를 향한 원망만을 뱉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하고 절망적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동성애자가 아니었다면, 아니 우리 사회가 동성애를 단지 하나의 취향으로 존중해주었다면, 어쩌면 그는 희생된 동성애자가 아닌 좋은 시인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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