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을 미리 정하지 않고 과정에 충실한 교육이 진정한 배움 가능하게 해

 

  가끔 택시를 타다 보면 운전기사님이 내게 선생이 아니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어떻게 아셨는지 되물으면 본격적으로 직업에 따른 손님들의 특성에 대한 기사님의 재미있는 해석이 이어진다. 때론 기사님이 너무 이야기에 심취해 운전에 부주의하면 어쩌나 불안해지기도 하지만 다행히 아직 낭패를 본 적은 없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드러나는 이런 개인의 특성의 차이는 타고난 성향도 있겠지만 직업에 따른 사회화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성향내지는 행동특성의 차이는 대학에서 전공에 따른 학생들의 특성에서도 많이 관찰된다. 물론 개인의 적성이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할 때 반영되지만 재학 중에 전공에 따라 사회화되는 부분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범대학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규범과 규율에 보다 순응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때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런 차이는 세부적인 학문분야의 특성을 고려하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개인의 합리성을 전제로 하는 경제학과 사회적 상상력을 강조하는 사회학의 차이 같은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전공 간의 특성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전공에 따른 사회화의 차이가 개인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가치관, 행동양식의 차이를 만들고 이러한 차이가 장차 사회에 나갔을 때 상호이해와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욱이 직업세계에서 분야 간에 형성된 위계는 특정 학문의 세계관이 더 우월하다는 사고를 은연중에 강화시킨다.

  대학에서 전공 이외에 다양한 교양과목을 이수하도록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사고의 치우침을 막고 인간사회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복수전공제도나 학부제도 이런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입시위주의 풍토 속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취업을 위해 학점 경쟁에 매몰되어 대학시절을 보내야 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교육은 수단적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우리 교육체제의 특성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에 미처 깨닫지 못한 자신의 관심과 흥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깊이 있는 지적 탐색을 하기보다는 이것을 배워 어디에 소용이 있을까 하는 질문이 학생들을 압도한다. 그리고 입학과 동시에 취업준비를 시작하지 않으면 늦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성급히 진로를 결정한다. 대학에서 직업과 연계가 뚜렷해 보이는 전공분야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래서 적성과 관계없이 복수전공을 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각한 취업난 속에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이직이 빈번한 현상은 대학에서 자신에게 맞는 진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여유를 갖지 못해서가 아닐까?    

  이러한 현상이 학생들의 잘못은 아니다. 대학과 우리 사회가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사회가 잘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교육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가 경쟁적이기 때문에 교육은 생존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그 반대는 불가능한 것일까? 진정한 교육은 그 결과가 어떤 것일지 미리 예단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교육의 목적은 미리 정하기 어렵다. 행선지를 정하고 떠나는 여행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길로 정해진 장소에 갈 것인가가 아니라 가는 방법과 가는 장소의 모습이 모두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인가를 배우고 깨닫는 과정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학생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치고 무관용과 무원칙의 경쟁만능 사회를 바꿀 대안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구축해가는 흥미진진한 과정으로 대학생활을 영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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