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 때문에 성희롱, 성추행 묵인하는 것은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

 

 친구가 울분을 토하며 동생의 일을 말했다. 수능이 끝난 후, 동네 갈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생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술에 취한 40대 아저씨는 19살 소녀의 가슴을 카드리더기에 신용카드를 긁듯이 손으로 긁었고 소녀는 그 자리에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문제는 주변의 반응이었다. 처음 보는 중년여성이 찾아와 자신의 친구가 실수를 한 것 같다며 선처를 구했고 급기야 가해자는 중년여성을 따라 피해자인 소녀의 집으로 찾아왔다. 소녀의 부모를 설득하며 조용히 넘어가자고 했다. 피해자인 소녀는 방에 숨은 채 밖으로 못한 상태에서 말이다.

 지하철 성추행, 직장 내 성희롱 등 포털 사이트 검색 창에 성추행, 성희롱만 검색해 봐도 수많은 연관 검색어가 쏟아져 나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불쾌한 일을 당한 뒤 신고를 할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성추행 및 성희롱에 대해 과연 누구의 잘못인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성희롱, 성추행을 유발한 옷차림이나 평소 언행이 문제라는 의견과 흑심을 품고 이를 말과 행동으로 옮긴 가해자가 문제라는 의견은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성희롱과 성추행 모두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상황도 모른 채 필자 입장에서 이분법적으로 잘잘못을 가린다면 분명 억울한 사람도 생길 것이니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덮어라”, “일을 크게 키우지 말아라”
 이것이 한국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대처법이다. 이와 같이 사회에 만연한 강압적인 지시 하에 피해자는 입을 다물고 목격자는 이를 묵인한다. 물론 자신이 불쾌한 일을 당했음에 분개하고 이를 보복하려는 이들도 있고 이러한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해자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가해자는 선처를 구하고, 목격자는 사건에서 손을 떼려 하고, 주변인은 피해자를 만류한다. 아직 한국사회에는 가해자를 벌하고 그들의 만행을 알리는 일이 익숙하지가 않다. 강력범죄가 아닌 성추행 및 성희롱은 덮어도 될, 혹은 덮어야 서로 ‘편한’ 사안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사건을 묵인하게 하는가. 문제는 문화이다. 이러한 ‘덮어버리자’식 문화의 근본적 문제는 타인의 시선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한다. 자신의 아들, 딸이 성추행 대상자가 되고 자신의 친구가 성희롱을 당한 피해자가 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를 키우지 않고 덮어야만 그들을 피해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지키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만의 착각이다. 성추행, 성희롱을 덮어두고 묵인할 때 피해자는 2차적 피해를 입는다.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주길 바랬으나 거절당하고, 가해자를 벌하고 싶었으나 가해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오히려 더 떳떳하게 살아간다. 묵인의 가장 큰 문제는 이처럼 피해자가 겪은 불쾌한 사건이 매듭지어 지지 않은 채 마음속에 응어리지고 만다는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선처를 구하고 ‘이런 일은 빈번하니 좋게 넘어가자’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  한국사회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신경 쓴 나머지 피해자를 보지 못하는 성희롱, 성추행 대처방식이고 피해자는 배재한 채 사건을 다루는 주변인들의 태도이다. 피해자가 오히려 더 죄책감을 느끼는 사회,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숨어버리는 사회가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강압적 묵인은 피해자를 은닉하게 만들고 가해자로 하여금 2차, 3차 범죄를 유발한다. 누군가 소리 내고 용기내지 않으면 이러한 ‘묵인 문화’는 고인 물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성희롱과 성추행과 관련하여 새로운 문화가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타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가해자를 벌하는 여부는 피해자가 직접 결정해야 할 일이다. 피해자는 뒤로 숨고 피해자의 주변인이 이를 마무리한다면 사건은 해결될 수 없다. 위로받을 이는 위로받아야하고 법적 대응을 바란다면 법적 대응을 해 주어야 한다. 권리는 피해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약자이든, 어린 아이이든.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