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전공자만의 전유물로 봐서는 안돼

 

 필자는 문학에 문외한이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편이고 훌륭한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곤 한다. 그때마다 과학도 쉽게 일반인들이 접할 수 있고 거기서 재미와 감동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하곤 한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이 교양으로서의 자연과학을 접하는 경우는 매우 적은 것이 현실이다. 일례로 필자는 “자연과학과 철학” 연계전공을 담당하고 있는데 수년간 이 전공을 신청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은 이과생들이었다.

 이렇게 과학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게 느끼는 이유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과학은 어렵다는 선입견을 들 수 있다. 문학이 특정 언어로 표현되듯이 과학은 주로 수학이라는 언어로 기술되는데 흔히 수학적 난해성 때문에 과학이 멀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어를 모르는 사람도 번역을 통해 톨스토이를 감상할 수 있듯이, 언어에 지나지 않는 수학없이도 과학의 진수는 이해할 수 있으며 이를 잘 전달하는 훌륭한 교양서적들이 많이 있다. 다른 이유로서 과학을 지식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교양이 아니라 특정 과학분야의 전공자만 공부하는 전공지식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꼽을 수 있고 필자는 이것이 더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는 현대과학문명의 기술적 측면이나 개개의 과학적 성과들만이 미디어를 통해 중점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전달됨으로써 과학을 도구적 측면을 과학과 동일시하는 편견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학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심오한 사상체계이며 철학이나 문학등의 사상적 조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발전해 왔다. 따라서 이들 사상체계들은 서로 닮은 점들이 많고 이를 통해 과학에 대한 문턱을 좀 낮출 수 있기를 바란다. 과학적 지식은 굳어진 것이 아니다. 영구적으로 옳은 과학적 진리도 없고, 오래된 과학사상이라도 무작정 틀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현대물리학의 출현에도 뉴턴의 고전물리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단지 그 적용범위가 줄어든 것이고 현대물리학도 언젠가는 그 한계가 드러날지 모른다. 중세까지 진리로 받아들여졌던 천동설은 지동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지만 사실은 태양도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천동설이 틀린 것 또한 아니다. 누가 움직이는가의 여부는 관점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문학이나 예술에서 중요한 미적 감각이 과학에서도 강조된다는 사실이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과학사를 살펴보면 똑같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이론이라도 더 간결하고 멋있는 이론체계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복잡하고 예외나 군더더기가 많은 이론은 결과적으로 항상 틀린 것으로 입증되어 왔다. 아인슈타인이 현대물리학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은 상대성이론 등 그의 개별적 과학업적이 아니라 과학의 전개방식에서 대칭성이라는 아름다움을 물리법칙보다 더 상위개념으로 정립한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과학에서는 소설보다 더 기발한 상상의 세계를 만날 수도 있다. 과학은 딱딱한 현실만을 다룬다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란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상상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현재 인류의 과학기술은 원자 하나하나를 조작하지만 원자보다 더 작은 세계는 끝도 없이 작아질 수 있고, 무인탐사선에 의해 태양계 구석까지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지만, 우주는 광속으로 날라 가도 백억년 이상 걸릴 정도로 광활하다. 이런 한계에 직면한 과학자들은 수평선을 바라보던 원시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상상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물론 문학의 허구적 세계는 실제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그럴 듯한 개연성을 가져야 하듯이 과학적 상상도 논리적 적합성을 따라야 한다. 이 논리적 적합성을 바탕으로 시간여행, 숨겨진 4차원이상의 공간, 평행우주 등 공상과학영화에서 단골로 다뤄지는 상상이 만들어졌다. 교양과학을 읽는 것은 상상력을 기르기 위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문학이나 예술을 감상할 때 사람 마다 다른 감동을 받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재미를 느끼는데 반하여 과학은 누가 보든 똑같아서 재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객관성을 정면으로 부인한다. 양자이론의 아버지인 닐스 보어는 자연과 관찰자를 분리할 수 없으며 관찰자에 의해 인식되기 전과 인식된 후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다시말해 과학은 주관적 주체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객관적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우주는 인식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진행될 수 있으며 완전히 무작위로 진행되기 때문에 누구도 이를 컨트롤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나의 사건 때문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는 인과론적 사고는 주사위를 던지듯 우연적으로 진행되는 비인과론적 사고로 바뀌었다. 비록 이런 주관성과 우연성은 객관적 자연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금과옥조로 여기던 고전과학에 종말을 고한 것이었지만 이는 새로운 현대과학의 지평을 열게 되었다. 현대의 전자문명은 이런 불확실성의 이해에서 가능해진 것이다. 좋은 과학은 인류에게 새로운 세계관과 상상력을 제시한다. 문학작품 읽듯이 교양과학서적을 접하면서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융합적으로 겸비한 21세기형 인재들이 본교에서 배출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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