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위해 '나'를 개조해도 진정한 자신의 모습 완전히 잊진 말아야

 

  얼마 전 광화문 빌딩 숲 틈바귀에 있는 한 맥줏집에서 친구들을 만났을 때 일이다. 사위를 둘러싼 고층빌딩들을 보며 취업준비생인 우리는 한창 상반기 채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 친구가 말했다. “저기 네모 칸이 저렇게 많은데, 저 한 칸에 들어가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 친구는 빌딩에 셀 수 없이 나 있는 네모난 창문들을 보고 있었다. 다른 친구가 말했다. “저렇게 많으면 뭐하냐. 내가 들어갈 네모 칸은 없는 것만 같은데.” 더 이상 말은 이어지지 않았고 다들 김빠진 맥주만 거푸 들이켰다.

 취업난은 이제 흔해빠진 구닥다리 얘기가 됐다. 이젠 왜 이렇게 취업난이 심각해졌는지, 이를 타개할 제도는 없는지에 대해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정부는 늘 무언가를 하고 있었고 기업도 늘 무언가를 했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관심을 둔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취업난은 너무도 빤한 얘기, 그냥 늘 우리 곁에 있는 변하지 않는 현실이 됐을 뿐이다.

  결국 이 취업난을 헤쳐 나가는 건 개개인의 몫이다. 현대인이라면 사회문제를 개인에게 짐 지우는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에 이물이 났을 테고, 또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까지도 지긋지긋할 테다. 하지만 막상 취업이 눈앞에 닥치면 다른 그 무엇도 생각할 물리적․심적 여유가 없다. 이 어려움이 누구 때문이고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그런 건 관심 밖이다. 일단 ‘나 하나 먼저 바늘구멍 좀 통과하고 보자’ 식의 사고가 생존본능처럼 생겨난다. 그리고 그 생존본능에 의해 우리는 철저히 기업의 입맛에 맞게 변해간다.

  이처럼 취업준비생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나 자신’을 점점 잃어가는 것 아닐까. 취업준비생이 된 이상, 비윤리적 경영 등을 이유로 지탄받는 기업일지라도 인터넷에 채용 공고가 뜨면 무조건 클릭하고 보게 된다. 서류 마감 날짜를 확인하고 자기소개서를 쓰기 시작한다. 이게 현시점 우리의 모습이다. 자기 자신의 가치관, 취향, 성격은 억지로라도 기억에서 지운다.

  자신을 기업에 맞게 개조하는 일은 전 채용과정에 걸쳐 일어난다. 기업들이 저마다의 인재상에 걸맞은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실시하는 ‘인성검사’는 대략 이런 내용이다. ‘나는 애매한 상황을 즐긴다’와 같은 질문이 주어지면 구직자가 이에 ‘매우 그렇다’, ‘그렇다’, ‘보통이다’, ‘아니다’, ‘매우 아니다’ 중 한 가지 대답을 고르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을 묻는 것 같지만 이 검사는 ‘정답’이 정해져 있는 ‘시험’이다. 기업이 원하는 대답을 고르지 못하면 ‘오답’이 된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 면접의 기회가 주어지기에 취업준비생들은 기업의 경영 철학, 기업 정신 등을 달달 암기해 자신의 가치관이 아닌 기업의 가치관에 맞는 대답을 한다. 자기소개서 역시 자신이 마치 그 기업에서 일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 기업의 중요 가치가 자신의 철학과 딱 들어맞는 것처럼 개조된 ‘나’를 어필한다. 그렇게 열 곳의 기업에 서류를 접수하면, 열 명의 새로운 ‘나’가 탄생한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 과정에서 결국 진짜 ‘나 자신’은 희미해진다.

  본래의 ‘나’는 대체 어떤 모양의 사람일까. 취업준비생에게 그건 중요치 않다. 기업이 요구하는 모양이 네모라면, 나는 네모가 돼야 한다. 그래야만 이 세상에 너무도 많아 보이는, 그렇지만 나를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빌딩 숲의 ‘네모 칸’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개개인에게 특정 모양을 강요하는 이 사회를 비판하는 건 취업준비생에겐 사치다. 자신의 모양을 기업이 요하는 대로—그게 네모라면 더 네모지게, 세모라면 더 세모지게—만들라는 말이 최고의 격려인 시대다. 그렇기에 자신만의 모양을 되찾으라는 말은 차마 꺼낼 수도 없다. 우리가 각자 고유하게 갖고 있던 모양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아주 잠깐의 시간을 내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점점 네모가 되어가는 당신은, 원래 어떤 모양이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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