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문화와 교양 이념(2)

 

  괴테시대(1770-1830)의 마지막을 장식한 낭만주의(1798-1830)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진보적 보편문학(progressive Universalpoesie)’을 강령으로 내세우며 등장한다. 그에 따르면 낭만주의문학은 “문학의 분리된 모든 장르를 재통합하며, 철학, 수사학과도 연계시키고”, 비평과 융합하고, 나아가 “삶과 사회마저도 시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예술은 자기 자신 이외에 어떠한 법칙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예술지상주의로 낭만주의는 독일문학사상 처음으로 유럽문화를 선도하게 된다.

  1790년대 후반 독일 예나에서 시작되어 ‘예나 낭만주의’로도 불리는 초기낭만주의의 특징은, 젊은 대학교수들과 대학을 갓 졸업한 지식인들 그리고 대학생들이 ‘집단적 운동’을 벌린 것으로 독일문학사에서 이렇게 작가들이 그룹으로 활동한 예는 극히 드물다. 1780년대 중반부터 시인, 문학비평가, 철학자, 그리고 자연과학자들이 모여들면서 인구 4500명 정도의 작은 대학도시 예나는 독일의 가장 진보적인 정신적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다. 

  질풍노도기의 드라마 <도적들>(1781)로 명성을 얻은 쉴러가 괴테의 추천으로 1789년 역사학 교수로, 1794년, 1798년, 1801년에 각각 피히테, 셸링, 헤겔이 철학교수로 부임하면서 예나는 칸트에서 시작된 독일 관념론 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학생들은 이들의 강연에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예나 대학은 신학문 도입에 앞장서며, 식물원을 세우고, 실험실을 만들고, 예술품을 수집했다. 1790년대에는 학생 수가 배로 증가하여 “지식인 공화국(Gelehrtenrepublik)”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당시의 재학생 수에 대해서는 500명, 800명이었다는 보고에서부터 그 보다 훨씬 많았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예나 낭만주의’는 괴테와 쉴러의 이념을 이어받아 프랑스의 ‘정치적 혁명’에 대한 대안으로 문화와 예술 분야의 혁명인 ‘미적 혁명’을 내세우는데, 대학 개혁과 새로운 대학문화에 대한 열망이 그 중심에 자리하게 된다. 슐레겔 형제와 그들의 부인들이자 여류작가이며 전위적 여성의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한 카롤리네와 도로테아, 그리고 티크, 브렌타노, 노발리스 등 청년작가들은 ‘낭만적 사교문화’라고 일컬어지는 독특한 소통의 문화를 발전시킨다. 온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하며, 삶과 문학, 예술과 학문 등 모든 것의 경계를 초월하고자 했던 이들은 ‘삶의 시화(詩化)’ 뿐만이 아니라 ‘시 자체가 삶’이 되는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 전통을 이어받은 ’공동철학하기 Symphilosophieren‘, 대화와 토론을 통해 보다 완전한 인간성의 실현, 인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대학은 이러한 목적 실현을 가능케 줄 ‘정신의 모델(Modell des Geistes)’로서, ‘인간학(Wissenschaft vom Menschen)’으로 불리는 하나의 통합 학문에 대한 지식인들의 열망은 오늘날의 학문의 융복합에 대한 요구보다 훨씬 강렬했다고 사료된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문학에 대한 대화>(1800)에서 보듯 ‘강의 Vorlesung’나 ‘대화 Gespräch’라는 제목을 붙인, 문학과 학술논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저술들, 그리고 티크의 <판타주스>(1812-17)같이 친구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형식의 틀소설집이 많이 출간된 것도 당시의 대학과 살롱문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이 그룹은 1800년경 흩어지지만, 예나 대학에 뿌려진 이들의 대학개혁 정신은 10년 후 빌헬름 폰 훔볼트가 주도한 베를린 대학 설립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1806년은 독일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의 하나로 꼽힌다. 프로이센은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투 패배의 결과 나폴레옹의 프로이센 점령, 신성로마제국의 해체, 빌헬름 3세의 러시아 망명 등 정치적 격변을 겪는다. 영토를 상실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1809년 망명에서 돌아온 빌헬름 3세는 당시 교육행정을 담당하던 언어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에게 대학 설립을 명한다.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괴테와 쉴러는 물론, 예나 낭만주의자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훔볼트는 슐라이어마허와 피히테의 대학론과 지식학 이념을 받아들여 1810년 대학을 설립한다. 정치권력의 지원은 받되 제약은 받지 않는 ‘교수와 학문의 자유’라는 그의 대학 설립 이념은 이후 전 세계 근대 대학의 이념으로 전파되게 된다.

  새로 설립된 베를린 대학(현 훔볼트 대학) 강의의 특징을 두 가지만 든다면 상이한 전공분야들이 모두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의 일부라는 인식, 그리고 현실비판이었다. 신학의 슐라이어마허, 철학의 피히테, 법학의 자비니, 역사학의 니부어 등은 모두 “학문의 백과전서적 통일”이라는 이상에 심취해 있었으며, 각자 이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동시에 자신들의 학문과 강의를 현실비판을 위해 사용했다. 예를 들어 니부어의 로마역사 강의는 독일역사와의 비교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당시 프로이센의 도덕적 상태, 개혁운동 및 ‘프로이센 일반국법’(ALR)에 대한 귀족계급의 저항 등을 다루었다. 그리고 독일은 이 시기에 진행된 다양한 개혁정책과 국민국가 부흥노력에 힙 입어 1813년 나폴레옹에 대적해 자유해방전쟁을 일으켜 승리할 힘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니부어는 훗날 그의 <로마사>(3권, 1811-1832) 서문에서 “베를린 대학의 개교 시기, 그것은 정말 멋진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흥미로운 것은 ‘대학생’이라는 개념이 사회비판의 척도로 쓰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베를린 대학 설립을 열렬히 지지했던 브렌타노는 1811년 사회를 ‘대학생’과 ‘속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고찰한 논문 <속물 Philister>을 발표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는 이미 괴테와 쉴러가 1797년 공동집필한 단시 모음 <크세니엔>에서 계몽주의 및 속물적 동시대인에 대항해 벌이기 시작한 투쟁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Philister는 성경에서 기원전 12세기 팔레스티나 해안에 살며 히브리인들과 긴장관계 속에 살았던 종족으로서, 팔레스티나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이 단어가 16세기에 대학생들 주변에서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대학생은 대학 재학생뿐만이 아니라, ‘인식을 갈망하는 자, 영원한 것, 학문 혹은 신 연구에 사로잡혀 있는 자, [...] 이념 Idee을 숭배하는 자’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에 반해 ‘존재에도 신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반복되는 일상성 속에 파묻혀 유용성의 원칙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모두 속물로서 낭만주의자들은 이들을 자신들의 문화적 적수로 천명했다.

  국가와 사회의 위기를 교육과 문화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 독일의 대학문화와 속물비판은 오늘의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생존을 위해 안정된 직장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학생들과, 학생 취업률에 목을 매고 있는 대학을 당시의 척도로 재어 속물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궁극적 목적이 개개 학생을 고유한 주체성을 지닌 인류의 대표자로 인정하고, 각 개인에게만 주어진 힘과 능력을 계발하여 각자의 ‘창조적 의지’를 발휘하도록 이끌어 줌에 있다는 생각까지도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치부해서는 안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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