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의 목소리는 높이 울린다
낮은 곳의 목소리는 높이 울린다
  • 조윤진 편집부국장
  • 승인 201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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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역노예 사슬 끊고, 인간답게 살아보자!’ 3월3일 본교 정문은 붉은 조끼를 입은 노동자의 고함으로 온통 뒤숭숭했다. 청소, 경비 노동자가 빗자루를 내려놓고 총파업에 들어간 것. 같은 날, 본교를 비롯한 서울 12개 대학 노동자 약 1600명도 총파업에 돌입했다. 2011년 집단 교섭 이후 사상 처음으로 사업장별 노동자조합(노조)이 굳게 쥔 주먹을 하늘을 향해 동시에 치켜들은 셈이다.

   이들이 요구한 내용은 시급 인상. 사업장별로 약 5210원~5700원의 시급을 7000원으로 올려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용역업체는 대학과의 재계약을 위해서는 임금 인상이 어렵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계약 주체인 학교 측이 제공하는 사용료에 따라 임금이 결정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학교 측은 이번 총파업이 용역업체와 노조 간의 문제라며 뒷짐 지고 있을 뿐이었다. 노동자의 마지막 목소리였던 총파업은 결국 용역업체가 임금 동결안을 고수하면서 협상이 결렬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맑은 하늘 아래, 노동자들은 다시금 입을 다물고 땅을 향해 고개를 떨궈야 했다.

   하루 이틀만의 일은 아니다. 학문의 전당의 대학에서 노동자의 파업은 불청객의 연례행사와도 같았고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고자 학내 노동자들이 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학교 풍경의 하나가 됐다. 이들이 머리에 두른 빨간 띠는 이제 학생들의 눈길조차 끌지 못한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날 하루 동안 학내 미화, 경비 업무는 일시 정지됐다. 화장실, 사무실 등 학교 곳곳의 쓰레기는 넘쳐나 치워질 줄 몰랐고 직원과 학생들이 팔을 걷고 나서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제야 그들의 존재가 불쑥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빈자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불과 반나절만의 일이었다. 근 2년간 잊고 지내던 이들의 존재를 체감한 것은.

   잠깐의 불편함은 그들의 존재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3일 오후1시, 호기심을 핑계 삼아 그들을 만났다. 일상에 불편함을 선사한 붉은 집단에 대한 단순한 물음표는 이내 민망한 느낌표로 바뀌었다. 머릿속에 그려온 ‘투쟁’의 이미지를 벗겨낸 노동자들. 그들의 맨얼굴은 너무도 평범하고 단출했다. 소주 한잔의 반주를 즐기는 아버지, 가끔은 곱게 화장을 하고 나들이를 가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이익단체를 상상했던 필자에게 이러한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들의 맨얼굴을 바라보고 그 목소리를 이해하게 됐다. 이 말은 자칫 위험한 발언처럼 들린다. 노동자에 동조하는 극단적인 좌파라는 편견에 가로막혀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이 ‘이해’는 이는 비단 ‘왼쪽’을 바라보는 사람만의 의무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노동자, 노조 등의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막연한 투쟁의 색채는 사실상 사회가 그들에게 덧씌운 과장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해와 동조는 분명 다르다. 그리고 개인의 성향을 반영하는 동조와 달리,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이해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동조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낮은 곳의 목소리는 높이 울린다. 학내 노동자들이 낮은 곳에서부터 내질러온 고함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세상을 온통 울리고 있었다. 낮은 만큼, 깊고 크게 울린다. 하지만 아무리 우렁찬 목소리도 듣는 대상이 없으면 허공에 던지는 메아리에 불과한 법. 그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려는 마음은 이제 그대의 몫이다. 그대의 귀와 마음이 열리는 때, 낮은 곳에서부터 전해져오는 그들의 목소리는 비로소 더 높은 곳으로 울려 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