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예희(경영·09) 「신을 옹호하다」

<신을 옹호하다>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신학자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가 신의 존재에 대해 논의를 펼치고 있다는 것과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만들어진 신>의 도킨스와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히친스 두 인물(이하 디치킨스’)을 주된 논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저자에 따르면, 신과 종교는 믿음과 사랑이 핵심적이기에 이성과 합리주의에 기반한 과학으로는 본질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한편 종교가, 특히 기독교가 많은 이의 공격대상이 되고 이처럼 신을 부정하게 된 데에는 기독교 내의 잘못도 있으며, 오늘날 자본주의와 계몽주의의 병폐에 대한 대안책을 초기 기독교의 자비와 사랑 정신에서 찾기도 한다

 디치킨스와 같은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나 근본주의자들의 가장 큰 오류는 신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데에 있다. 그들은 신이 존재한다면, 그 사실을 확신 받길 원한다. 하지만 신은 세상 속에서 실체를 지닌 존재가 아니다, 신은 세속의 정치적 지도자처럼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설계를 하는 존재도 아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신은 세상이 보기에 좋았기에만든 것 뿐이다. 따라서 과학과 기술의 개발은 우리 삶 속 현상들을 설명해주는 원리는 밝혀낼지언정 애초에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됐는지의 물음은 해결해줄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의 진위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불확실하고도 고통스러운 세상이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에 있다. 종교적 믿음에 회의적이라면 인류의 가장 일반적 감정인 사랑을 살펴보자. 사랑은 가 만나 지금 이 순간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연인들 사이에서, “당신, 나를 왜 사랑하나요?”라고 묻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이 부질없는 질문임을 알고 있다. 연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랑의 이유를 상대방의 장점을 나열하며 얘기해주거나 지난 추억들을 되짚어 보며 설명한다고 해보자. 그 사실들을 종합하면 사랑이 완전히 설명되는가? 아니다. 사랑은 이러한 사실들로 환원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영역에 있다. 기독교에서 신의 실재성을 인간의 온 수단과 방법을 통해 증명하는 행위 또한 무의미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체 신은 무엇인가. 신은 곧 믿음 그 자체이며 사랑이다. 디치킨스의 열렬한 유신론 비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맥이 빠지는 이글턴의 주장을, 나는 디치킨스가 온 지지를 보내는 과학을 통해 좀 더 설명해 보고자 한다. 20세기 과학사에서 가장 큰 이정표였던 양자역학의 설립은 힘의 운동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핵은 원자와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때 전자는 입자적 성격과 파동의 성격을 모두 지닌다. 이는 전자가 고정적 위치를 지니지 않고 확률분포에 따른 가변적 위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물질의 기본 단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닌 가능성의 존재라는 것은 당대 아인슈타인조차 인정하기 어려운 발견이었다. 그 가능성을 결정지어주는 것, 즉 고정된 위치 값을 확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관측이었다. 내 앞에 있는 책상이 절대 불변의 값으로서 고정되어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의 존재를 내가 눈으로 보고 관측하여 앞에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양자역학은 이글턴의 신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유효하다. 실체도 없는 신을 어떻게 정의 내린단 말인가. 이글턴이 신을 믿음이고 곧 사랑이라고 한 것은 디치킨스에 비해 빈약하고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신은 믿고 따르며,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사는 인간 속에서 주지한다. 우주 어디엔가 실존하고 있는 주체가 아니라, 공동체의 사랑과 믿음 속에서 그 존재가 결정되는 것이다. 나의 믿음이 곧 신과 종교의 핵심이자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존재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니 그 안에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신이 만물을 통제하여 결정짓는 건설자도 아니고, 인간을 선행과 악행에 따라 구분 짓는 심판자도 아니라 그 믿음 자체에 있다면 신의 유무가 무슨 차이를 만드냐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이글턴은 책에서 토마스 하디의 창의적인 질문을 소개한다. 하디는 신이 초월적 존재로서 인간 세계를 떠나 있다면, 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냐고 반문한다. 이는 앞서 얘기한 믿음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오히려 인간의 행복을 어렵게 만들었다. 신과 달리 불완전한 인간은 완벽하고도 예측 가능한 결정을 내릴 수 없기에 자신이 선택에 따라 필연적으로 고통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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